HOME 특집
톨게이트에 로시니가 울려 퍼지려면맥락이 빠진 합리를 넘어, 함께 실존하기 위해
  • 박진성 기자
  • 승인 2020.05.31 20:35
  • 호수 1853
  • 댓글 2

대처리즘이 영국을 덮은 1992년, 그림리 탄광의 광부들은 작업복이 아닌 밴드 유니폼을 입고 있다. 시대는 바뀌고 있었다. 정부는 폐광 정책을 추진했다. 악기를 들고 움직이는 광부들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영화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 이야기다. 그로부터 30년 남짓이 지나, 2020년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톨게이트에서는 20세기 탄광의 풍경이 반복된다.

물결에 휩쓸리다

하이패스가 늘어날 때마다 도로공사는 용역업체에 공문 하나를 보내 매년 수백 명씩 잘랐다. 손 안대고 코 풀기. 하이패스 도입 후 새로운 일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건 사장들이 노동자를 쥐어짜 해결하면 됐다.
-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7개월간 투쟁을 기록한 『우리가 옳다』 中

시대는 커다란 바위를 사회라는 물에 던진다. 그 파장과 물결을 감수하는 것은 가장 작은 존재들의 몫이다. 명분은 ‘합리’, ‘효율’, ‘발전’이다. 광부들과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다른 듯 같은 물결에 휩쓸렸다. 그림리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 지휘자 대니는 밴드를 지키고 싶어했다. 100년 동안 전쟁도, 재난도, 대공황도 버텨냈던 밴드였다. 그러나 탄광의 존폐가 달린 상황 속에 밴드는 그토록 원했던 전국대회 참가조차 힘들어 보였다. 밴드원들은 생활고 속에서 흔들렸고, 탄광 운영사는 지친 그들을 회유했다. 탄광 폐쇄에 찬성하고 퇴직금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수락하면 당장의 생활고는 해결할 수 있지만 평생 몸담은 일자리를 잃게 되는 상황이었다.

지난 2008년 한국도로공사(아래 도로공사)는 톨게이트 영업소들을 외주화했다. 이 또한 ‘합리’와 ‘효율’을 위함이었다. 간접고용 형태 속에서 불안정하게, 혹은 불법파견 형태로 고용된 노동자들은 그림리의 광부들처럼 위태로웠다. 결국 2013년, 365명의 노동자들은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1, 2심에서 모두 노동자들을 직접고용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도로공사는 직접고용 대신 자회사 전환을 추진했다. 직접고용의 탈을 쓴 꼼수였다. 약 1천500명의 노동자들은 이를 반대했고, 해고됐다. 탄광에서도, 톨게이트에서도 효율성의 대가는 작고 약한 이들의 안위였다.

근대의 위대한 산물인 ‘합리’는 현대 또한 관통한다. 사용자의 효율적 선택은 보편적 규범이 됐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인간이 겪는 수많은 비극이 ‘합리’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살아가며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한계상황들을 마주하고, 좌절 속에서 이성과 합리의 한계를 목격한다. 야스퍼스는 존재 실현을 이루는 방법이 바로 이 좌절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이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 속, 광부와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한계상황을 맞았다.

실존의 회복, 울려 퍼지는 로시니

폐광의 기로에 놓였다. 광부들은 투표했다. 결과는 폐광과 퇴직금 수락이었다. 마을은 침울했고 대니는 폐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평생 석탄 가루를 마시며 일한 광부였다. 그러나 그가 입원한 병실 밖,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대니를 위해 밴드가 모인 것이다. 임시로 지휘봉을 잡은 해리의 손짓은 어색하기만 하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을 맞는 인간에게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좌절하거나, 극복하거나. 극복해낸 인간은 실존을 회복하고 비약하며 초월에 닿는다. 실존 회복의 언어는 다양했다. 광부들은 악기를 들었고,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캐노피에 올랐다.

고공농성이 이어지던 중, 지난 2019년 1월 대법원은 직접고용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캐노피에서 내려올 수 없었다. 도로공사는 소송을 낸 노동자들만 직접고용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2019년 7월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청와대 앞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했다. 당해 9월에는 도로공사 김천 본사에도 모여 점거 농성을 병행했다. 당시 본사는 노동자들이 화장실도, 전기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기나긴 투쟁 끝에, 도로공사는 법원의 판결 취지에 따라 전원 직접고용을 발표했다. 2015년 이후 입사자에 대해서는 추후 판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단서조항이 달리긴 했지만, 7개월간 이어진 투쟁은 마무리됐다.

한계상황에서 실존을 회복한 것은 광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연주를 결심한 광부들은 런던행 버스에 올라탄다. 병원을 몰래 빠져나온 대니도 함께한다. 로시니의 「윌리엄텔 서곡」이 알버트 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들은, 보란 듯이 우승한다.

여전히 남은 문제, ‘맥락이 빠진 합리’

“내 동료들은 저 트로피가 누구보다도 내게 중요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사실 나도 그런 줄 알았죠. 음악만이 중요하다고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어떻게 사람과 비교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상을 탔어도 사람들에겐 별일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다함께 거절한다면 화젯거리가 되겠죠? 지난 10년간 정부는 산업 전체를 파괴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가정, 인생까지도요.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몇 푼의 돈을 위해서죠.”

‘합리’에 내재된 폭력성은 우리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폭력에는 저항이 당연하게 뒤따른다. 광부들과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합리의 논리 아래 자행되는 폭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합리’를 ‘진리’로 아는 사람들은 이들의 저항에 무관심 혹은 손가락질을 보냈다.

그림리 밖의 사람들은 전자였다. 대니가 우승 트로피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생계를 짓밟힌 광부들의 외침보다, 영광의 순간 트로피를 받지 않겠다는 우승 밴드의 한 마디에 기자들의 카메라가 번쩍였다. 톨게이트 사태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는 후자였다. 연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비난의 여론도 거세게 일었다. ‘노력 없이 정규직 자리를 거저 차지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을 정규직화해선 안 된다’고 비난했다. 합리에 저항하는 이들은 진리에 저항하는 이들로 간주됐다. 합리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서 한 발짝씩 멀어졌다. 공동체적 감수성은 해묵은 유물이 됐다.

지난 5월 15일, 도로공사는 2015년 이후 입사자, 1심 계류 중인 톨게이트 노동자까지 전원 직접고용을 발표했다. 아직 남은 과제들도 있다. 새로운 직무, 줄어든 급여, 투쟁의 후유증이 발목을 잡고 있다. 야스퍼스가 말한 실존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세계 내 존재로서 다른 구성원에 갖는 공감은 인류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는 불의에 침묵하는 것을 죄라고 말한다. 이는 연대가 필요한 까닭이다. 우리가 실존할 수 있도록, 함께 실존할 수 있도록.

글 박진성 기자
bodo_yojeong@yonsei.ac.kr

<자료사진 『우리가 옳다!』(이용덕 저), 충남 노동자뉴스 길 백승호 기자, 네이버 영화>

박진성 기자  bodo_yojeong@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