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The Y
[기획] 전태일의 꿈, 그리고 오늘
  • 조재호 변지후 정여현 기자
  • 승인 2020.05.31 22:00
  • 호수 58
  • 댓글 0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불꽃이 돼 버린 날이다. 전태일은 한국 노동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로, 올해 분신 항거 50주년을 맞이했다. 『The Y』는 개관 1주년을 맞이한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을 방문해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의 움직임이 한국 노동 환경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짚어봤다.

▶▶전태일이 주장한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 최초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이 세워졌다.
▶▶높이 1.5m도 되지 않는 좁은 다락방에서 노동자, ‘시다’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도 못하며 기계처럼 일해야만 했다.


노동3권을 외친 청년운동가의 화신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전태일기념관은 1970년 스물세 살의 청년이었던 전태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다. 전태일은 대구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구와 부산, 서울을 오가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고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살 무렵,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봉제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안정된 직장에서 기술을 배워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그의 희망과 평화시장 속의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어린 ‘시다’*들은 햇볕이 들지 않고, 허리조차 제대로 펴기 어려운 낮은 천장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밤샘 노동에 시달렸다. 끼니를 때울 시간조차 없이 한 달을 꼬박 일해도 1천500원이란 적은 월급이 그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는 전부였다. 이는 당시 전태일의 하루 하숙비가 120원이었음을 고려했을 때 생계를 유지하기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전태일은 이렇게 열악한 노동 환경 속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바보회’**, ‘삼동친목회’***등의 노동 단체를 결성하고 설문지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전반적인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1970년 10월, 그는 이러한 설문 결과를 바탕으로 ‘평화시장 피복 제조업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 진정서’를 작성해 노동청에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로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가 작성한 진정서가 언론의 주목을 받아 사업주들과 협의할 기회가 주어진 적도 있으나, 업주들이 삼동친목회를 사회주의 조직으로 매도하는 바람에 이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정·재계는 전태일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사회주의자’란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그를 중심으로 합심한 노동자들의 모든 움직임에는 강한 압력이 가해졌다.
이미 명문화된, 그러나 허울뿐인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의지조차 없는 고용주와 국가기관의 강압 아래 전태일은 깊은 좌절과 비애를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는 마지막 고함으로 ‘죽음’을 택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그는 스스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쥔 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의 처절한 외침은 온몸이 불로 뒤덮일 때까지 이어졌고,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못다 이룬 일을 이루어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전태일의 분신 항거는 당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반독재,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고 시위하던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그들보다 더욱 낮은 곳에서 고통받아온 노동자들의 현실에 눈뜬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대학생들로 하여금 더 나은 사회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노동’이란 새로운 분야에도 목소리를 내야 함을 깨닫게 했다.
마침내 1970년 11월 17일, 전태일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결사체인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전태일 죽음 후 일주일조차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1971년 한 해 발생한 노동자의 단결 투쟁은 대략 1천600건에 이르는데, 이는 전년도 165건의 10배가 넘는 규모였다.

지금도 어딘가엔 전태일이 있다

전태일의 분신 항거 이후, 우리 사회에 노동문제에 대한 대대적 각성이 있었다는 점은 자명하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각종 집회 및 농성을 전개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그들은 박정희 정권의 노동3권 봉쇄 시도에 항거하고 전두환 정권의 노동 탄압에 대항하는 구로동맹파업****을 이끄는 등 새로운 노동사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그 결과 과거에 비해 노동 시간은 줄어들고 임금은 올라 보다 ‘인간다운’ 노동 환경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비정규직 문제’라는 고질적 노동문제는 우리 곁에 남아있다. 지난 2017년 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체 일자리 수 대비 비정규직 비율은 20.6%로 OECD 평균인 11.2%의 2배 이상에 달한다. 전체 순위 또한 36개국 중 8위로 매우 높은 편이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달리 근로 방식, 근로 시간, 고용의 지속성 등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고용형태다. 전체 노동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근로 형태는 노동 환경 전면에서 그 취약함을 보인다.
비정규직은 고용 불안정과 낮은 임금이라는 문제를 겪고 있다. 보통 단기간 고용되는 비정규직은 기본적으로 노동3권을 보장받기 어렵다. 정규직과 달리 노동조합 가입이 어렵기 때문에 고용인의 임금 착취나 체불 및 횡포 등의 문제에 대응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비정규직으로 일해서라도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경제·사회적 약자는 낙후된 환경에 반발할 수 없다. 또한 2017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한국 가구와 개인의 경제활동 한국노동패널 기초분석보고서’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받는 월평균 임금은 171만 7천 원으로 정규직 근로자가 받는 302만 3천 원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비정규직 중 월평균 임금이 가장 높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월평균 임금도 207만 3천 원으로 정규직 근로자의 68.6%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 형태는 수많은 참사를 불러왔다. 지난 2018년 12월, 24살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씨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철광석을 이송하는 설비를 점검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끼어 숨졌다. 당시 김씨는 야간 근무 중이었고 현장을 관리하는 다른 인력도 없었던 터라 그는 사고를 당하고 4시간 뒤에서야 발견됐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김씨의 회사인 한국발전기술의 관계자가 ‘야간에 2인 1조로 근무하는 게 원칙이지만, 회사의 인력수급 문제로 1명씩 근무했다’고 진술함에 따라 작업 현장에서 안전규정이 제대로 준수되고 있지 않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후 공개된 원청 태안화력발전소의 부서별 평가 문서에 따르면, 산업재해로 사람이 숨졌을 시 발전사 직원은 1.5점, 하청 직원은 1점, 발전시설 건설 노동자가 숨지면 0.2점을 깎는다고 적어 놨다. 사람의 목숨을 직급에 따라 세 단계로 구분해 놓은 지표인 셈이다.
그의 죽음은 비정규직 문제를 다시 한번 우리 사회의 수면 위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해가 두 번 바뀐 지금, 나아진 것은 거의 없다. 고인의 동료를 비롯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국발전기술지부 조합원(아래 조합원)들은 그간 김씨의 사망 이후 비정규직 철폐와 안전한 노동 환경 마련을 목표로 하는 대책을 담은 합의안을 발표했으나 현재까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지난 5월 27일, 조합원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등 합의안 이행을 촉구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 되돌아봐야만 한다. 그간 현장에서 일어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는 뚜렷한 진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시사점만 던질 뿐, 문제 해결의 책임은 여기저기 떠넘겨진 행태가 이어졌다. 고용주의 노동 환경 개선과 정부의 지원은 언제나 요구돼왔으나 그 실현은 늘 어떻게든 가로막힌다.

1970년 그날의 전태일은 역사로 남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또 다른 전태일이 또 다른 방식으로 아파하며 노동 환경 개선을 외치고 있다. 그 수많은 이들을 위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그의 죽음 뒤 속절없이 흐른 50년을 기억하며, 인간이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다가올 50년을 기약해본다.

*시다: ‘견습공’을 뜻하는 일본어 단어인 시타바리(下張り)에서 유래된 속어.
**바보회: 전태일이 1969년에 만든 노동운동단체로, 평화시장 근로조건 개선을 목표로 활동했다. 이름의 의미엔 노동자들이 바보처럼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모습에 대한 항의가 담겨 있다.
***삼동친목회: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를 지칭하는 삼동의 노동자들이 모여 단결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구로동맹파업: 1985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구로지역의 민주노조들이 노조운동탄압에 맞서 벌인 동맹파업과 지지연대투쟁.

글 조재호 기자
jaehocho@yonsei.ac.kr
변지후 기자
wlgnhuu@yonsei.ac.kr

사진 정여현 기자
jadeyjung@yonsei.ac.kr

조재호 변지후 정여현 기자  jaehocho@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