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나 보도부장 (정경경제·18)


남겨진 자를 생각하다 

 

23년이라는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사회적으로 이슈화된 몇 가지 죽음을 경험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갑작스럽게 자살하기도 했고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이 수학여행 중에 많은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추모했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많이 기억한다. 

우리는 이렇듯 살면서 많은 죽음을 경험한다. 나의 삶이 끝나는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그들을 기억한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기 때문에 적당한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달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남겨진 자가 되기 전까지, 정확히 그 순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삶과 죽음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본다. 하지만, 남겨진 자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해보지 않는다. 주변인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남겨진 자에 대한 고통을 생각하기 어렵다. 나 역시도 지난 시간 동안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만 생각해봤을 뿐,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남겨진 자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더 나아가, 누군가의 죽음이 한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은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남겨진 자가 되다

 

2년 전, 나는 이 세상을 떠나기엔 너무 이른 나이인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 가까운 누군가를 처음 잃어봤기에 슬퍼할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삶의 유한성은 죽음의 슬픔을 달래주는 충분한 이유지만 그런 이유로는 나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내가 속한 죽음’은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삶의 끝인 죽음이 삶을 바꿔놓았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너무나 맞는 말이다. 내 사람의 죽음은 나의 삶을 바꿔놓기 충분했기에 나는 남겨진 자로서 여전히 아프다. 

2년이 지나도 여전히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무섭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죽음’이란 빛의 흔적조차 없는 어둠일 뿐이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이젠 놓아줘라”, “그만 울어라”라는 말을 하곤 한다. 실제로 그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면서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죽음의 슬픔을 경험하긴 했을까. 남겨진 사람들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계속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 

나는 남겨진 자가 된 이후로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 ‘저 정도면 충분히 슬퍼했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에 적당한 슬픔은 존재할리 없다. 아마도 남겨진 자가 되어 떠난 사람을 보내주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부디 남겨진 자에게 적당한 슬픔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겨진 자가 된 나의 삶은 어떨까. 물론 모든 남겨진 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남겨진 자가 된 후 그 아픔을 들키지 않기 위한 가면을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 나의 상처를 보이지 않기 위해 원하지 않는 가면을 쓴다. 남겨진 자가 돼 내 기억 속 우리의 화면은 평생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추억 속의 그대가 없지만 내가 그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남겨진 자로서의 추모인 것 같다. 적어도 나의 방법은 그러했다. 남겨진 자가 된 나는 매 순간 떠난 이를 기억한다.

 

이 글로써 나는 밤하늘의 별이 된 모든 이를 추모한다. 떠나간 이의 삶 속에 우리는 없지만 남겨진 우리의 삶 속에 떠나간 이의 삶은 영원히 남아있다. 남겨진 자로서 나는 떠난 이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나는 어떤 죽음도 시간을 기준으로 슬픔을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그 누군가의 추억 속에서 잠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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