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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토불이] 보임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이들『디디의 우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소수자의 눈으로 조명한 현대사
  • 박준영 기자
  • 승인 2020.05.24 19:36
  • 호수 1852
  • 댓글 1

20세기 후반 현대사는 데모와 시민운동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집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지난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었던 대규모 촛불 집회는 혁명으로 기록됐다. 한국 사회에서 전개된 혁명적인 역사에 시민들은 일체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황정은 작가는 『디디의 우산』을 통해 그것이 착각이었다고 말한다.

▶▶ 당시 종합관이었던 교육과학관. 연세대 사태 당시 종합관에 갇힌 4천 명 중 한 명이었던 ‘나’는 경찰로부터 성추행과 폭행을 당했다. 언론 보도로도, 역사로도 기록되지 않았던 투쟁 속 그들은 힘없는 개인일 뿐이었다.

‘사태’와 ‘항쟁’ 사이에 남은 1996년의 연세대

소설은 ‘나’가 연인 서수경과의 첫 만남과 재회를 떠올리며 펼쳐진다. 첫 만남 이후 몇 년이 흐른 1996년 8월, ‘나’와 서수경은 우리대학교에서 재회한다. 둘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아래 한총련)이 우리대학교 캠퍼스에서 개최한 범민족대회에 참가했다. 일명 ‘연세대 사태’라 불린, 대학 내에서 열린 마지막 데모다.

연세대 사태는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9일 동안 벌어졌다. 개막식이 열린 12일부터 학생과 경찰의 대치가 이어졌고, 16일 경찰이 강경 진압 작전을 펼치면서 학생들은 종합관으로 밀려 들어갔다. 헬기가 건물 위로 온종일 최루액을 뿌렸고 생필품과 의료품 보급은 차단됐다. 학교 밖 명동 성당에서는 ‘연세대 농성자 안전귀가’ 시위가 벌어졌다. 20일 경찰이 3천499명을 연행하며 사태는 종결됐다.

기자는 당시 종합관이었던 교육과학관을 찾았다. 경사길을 오르자 낡은 외관의 교육과학관이 보였다. 오늘날 많은 교양 수업이 열리는 이곳에 4천여 명의 학생이 수일 동안 갇혀 있었다. ‘나’는 1996년 여름 종합관에 갇힌 여학생 중 하나였다.

"최루액 냄새, 굶주림과 목마름, 야간기습과 체포에 대한 공포, 더위와 습기와 화학약품 부작용으로 문드러진 동기의 등…(중략)…그리고 “XX는 어떻게 씻었냐 드러운 년들”

연행 당시 경찰은 성추행과 폭력을 일삼았다. 그러나 경찰의 추행과 폭력은 보도되지도, 주목받지도 못했다. 한총련이 데모한 이유, 야만적인 진압 행태, 사실을 왜곡한 언론 보도 등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학생운동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진압과정에서 의경이 숨진 것이 대중이 등 돌린 결정적 계기였다. 운동에 가담했던 저학년 학생들은 강경 진압을 경험한 뒤 운동에서 발을 뗐다. ‘나’와 서수경 역시 연세대 사태 이후 학생운동과 담을 쌓았다.

그러나 사태 이후 일어난 일련의 사회적 참사와 연세대 사태를 연상시키는 시위대의 모습은 그날의 기억을 소환했다. 용산 참사는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대표적 사례다. 정부는 시위대에 ‘폭력적’ 이미지를 씌우고 강경 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 연세대 사태에서 의경의 사망이 강조됐다면, 용산 참사에서는 시위대의 불법성이 집중 조명됐다. 언론까지 가세해 시위대는 사회적 약자에서 공권력에 대항하는 단체가 됐다. 스스로 온전히 보일 기회를 박탈당한 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시위대가 결성된 이유와 그들의 요구는 와해되고 폭력의 잔상만 남는다.

"차벽은 벽으로써 시위 관리에 동원되지만 시위대가 그것에 손을 대고 흔들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더는 벽이 아니고 재산이 되잖아. 국가의 재산. 시위대의 움직임은 가로막힌 길을 뚫는 돌파행위가 아니고 재산 손괴 행위가 된다."

▶▶광화문 광장에서 비를 맞으며 시위를 하는 모습. 광장을 가득 메웠던 ‘모두’가 떠나고 그곳에 남은 사람들은 ‘소수자’가 됐다. 이들에게 있어 광화문 광장은 투쟁하는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몇 안 남은 장소이다.

우리가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

기자는 학교를 나와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코로나 여파와 궂은 날씨에 광화문 광장은 텅 비어있었다. 시위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시위대의 메카라 불리는 것과 상반된 모습이었다.

지난 2016년 광화문 광장을 메운 촛불 집회 이후, 광화문은 혁명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누적 인원 1천700만 명을 동원한 역대 최대 규모 집회에 ‘나’와 서수경도 동참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일체감 속 균열을 경험한다.

당시 집회에 참여한 ‘나’는 팻말을 든 남성을 본다. 팻말에는 ‘惡女 OUT’이라는 다섯 글자가 적혀있다. 추운 겨울 한 손에는 촛불을, 다른 손에는 핫팩을 들고 서 있는 수많은 여성 사이에서 그는 버젓이 그 팻말을 들고 있었다.

"그는 자기처럼 이 자리에 나온 많은 여성들은 왜 보지 않을까. 惡女라고 빨갛게 지칭할 때 ‘그 사람’의 여성은 그렇게 선명하게 보면서도. (중략) 나는 말했다. (중략)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에 대해서도."

‘惡女 OUT’을 본 순간 ‘나’는 일체감에서 벗어나 이질감을 느낀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나왔으나, 같은 층위에 속하진 않는다. 광장에 나선 ‘나’는 촛불을 든 집회 참가자면서 여성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는다.

‘악녀’를 보는 순간 기자는 한 단어가 떠올랐다. 한 의원이 공식 석상에서 사용해 논란이 됐던 ‘달창’이라는 표현이다. ‘달창’은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 모임인 ‘달빛기사단’을 비꼬는 ‘달빛창녀단’의 준말이다. 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창녀라는 단어로 표출됐다. 경찰 대 학생, 우파 대 좌파, 시민 대 탄핵 된 대통령… 사회·정치적 대립이 여성을 비하하는 언어로 치환된다.

모든 단어와 문장은 개인의 사고를 보여주며, 때로는 개인의 발화가 사회 전체의 의식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악녀’, ‘창녀’ 등의 단어를 통해 극단적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우리는 보여야 한다
존재하기 위해, 잊히지 않기 위해

여성이자 성 소수자인 ‘나’가 회상하는 현대사는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소수자의 이야기다. 레즈비언 커플인 ‘나’와 서수경은 20년째 동거하는 사이지만,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 둘 중 한 사람이 사고를 당해도 다른 사람은 연락받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그들의 관계는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둘 사이 관계를 묻는 말에 친구 혹은 친척이라 둘러댄다. 그렇지 않으면 둘을 둘러싼 성적 상상과 혐오 표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이태원 클럽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자 기사와 커뮤니티는 ‘게이클럽’이라는 네 글자로 도배됐다. 클럽에 간 행위보다, 게이라는 정체성이 더 회자됐다. 행위가 아닌 정체성을 향한 비판과 혐오 발언도 이어졌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성 소수자는 커다란 딜레마에 직면한다. 보이면 공격당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나치는 게이에게 핑크 트라이앵글 배지를 달고 다니도록 강요해 낙인을 찍었는데 레즈비언의 경우에는 그들만을 지칭하는 낙인이 따로 없었고…(중략)…레즈비언의 낙인/상징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들이 남성 동성애자보다 적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덜 보였다는 뜻일까?”

성 소수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딜레마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이후 세월호 집회는 ‘나’와 서수경의 일상에서 중요한 일이 됐다. 집회가 열리는 주말이면 간식이 든 배낭을 메고 광장으로 나갔다. 2016년 4월 16일 역시 ‘나’는 서수경과 광화문 광장에 갔다. 이후 동생 김소리로부터 평소에 두려워했던, ‘이제는 그만하라’는 말을 듣는다.

"언니,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면 안 될까. (중략) 내 집에서 내 아이의 자국들을 볼 때마다 난 그 애들이 생각나. 나처럼 그런 걸 하나하나 목격하며 그 나이로 자랄 때까지 아이를 키웠을 엄마아빠들이. (중략) 나는 무서워."

기자는 세월호 추모관으로 향했다. 추모관 옆 횡단보도 앞에 다섯 명의 시위자가 우산을 쓴 채 커다란 팻말을 들고 있었다. 노란색 팻말에는 진상규명과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자 몇 초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다섯 개의 우산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세월호 참사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참사로 남았다. 김소리 역시 일상에서 피해자와 가족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의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사람들은 참사와 자신의 일상을 분리하고 피해자를 타자화한다. 이러한 심리에 기인한 무관심은 혐오를 방조하고 소수자를 소외시킨다. 그러나 노란 팻말은 광장 중앙을 떠나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잊히지 않기 위해서는 반발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보여야 한다.

소설은 배제가 구조화된 사회에서 소수자가 직면한 상황들을 통해 현대사를 재조명한다. 우리 사회가 혁명을 완수했다는 자축은 과정에서 배제된 소수자를 향한 기만이기도 하다. 광장은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두’라는 말은 교묘하게 소수자를 지우고 보이지 않게 한다. 보임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이들을 위해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은 광장이 필요하다.

글 박준영 기자
jun0267@yonsei.ac.kr

사진 조현준 기자
wandu-kong@yonsei.ac.kr

박준영 기자  jun0267@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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