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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의 광주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김수빈 기자
  • 승인 2020.05.17 22:43
  • 호수 1851
  • 댓글 1

1980년 5월 18일.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신군부 집권을 규탄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민중항쟁이 시작됐다.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광주 시민들은 저항했다. 그 시작에는 대학생들이 있었다.

▶▶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에는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 흔적이 남아있다.

광주에 울려 퍼진 함성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입니까? 경찰 아저씨, 당신들은 우리 편입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중략)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물러나겠습니다.” -전춘심

5월 18일 공수부대원들이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귀가하라”며 전남대 교문을 막았다. 아침 10시, 학생들의 시위가 진행됐다.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가 노래와 함께 울려 퍼졌다.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을 휘둘렀다. 함께 시위하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금남로로 가자!” 공수부대원들에 쫓기던 학생들은 광장으로 향했다.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최초로 학생들의 연좌시위가 시작됐다. 다음날인 5월 19일 수많은 시민이 투쟁에 합류했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와 버스를 중심으로 100여 대의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대가 거리를 메웠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금남로에 매일 함께 모여 계엄군에 맞섰다. 금남로는 항쟁, 민주의 거리였다.

“이상하게 하체에 힘이 푹 꺼지면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총을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니까 무서움이 들어 밑을 내려봤다. (중략)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장갑차 뚜껑에서 나왔던 총대로 인해서 부상당했다.” -김영찬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 포위되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다. 첫 발포로 한 학생이 총에 맞았다.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분노했다. 발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계엄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청년들이 계속해서 쓰러졌다. 언론은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조작된 보도를 냈고 교통·통신 수단이 모두 끊어진 광주는 고립됐다.

▶▶ 상무관에는 시민들의 주검이 안치됐다. 5월 29일, 계엄군이 광주를 점령한 뒤 주검은 망월동 시립묘지로 옮겨졌다.

각자의 자리에서 가득한 열정으로

“여고생 한 명이 위에는 교복을, 밑에는 흰 체육복을 입고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을 맞고 여학생이 쓰러지는 게 아닌가.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한참 지난 뒤에 쓰러진 여학생을 홍안과로 데려와 살펴보니 이미 숨진 후였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 조선대 학생 김종배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계엄군의 총과 곤봉에 시민들은 쓰러졌다. 하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무기고를 점령해 시민군을 꾸렸다. 맞서 싸우는 학생들도 많았다. 학생들은 힘을 합쳐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 2대를 설치했다. 전남도청 취사반에서 시민군을 돕는 학생들도 있었다. 전남대 학생들은 ‘계엄령이 떨어졌다. 계엄령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제작해 살포했다. 침묵을 강요당한 언론에 학생들은 대안 언론으로 ⌜투사회보⌟를 만들기도 했다. ⌜투사회보⌟팀은 투쟁의 열기를 끌어올리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22일 이후 도청 앞 궐기대회를 준비했다. 학생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함께했다. 5·18 기념재단 박진우 연구실장은 “5·18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정신으로 이루어진 한국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사건”이라며 “5월의 광주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 전했다.

“반쯤 열려진 관 뚜껑을 젖히고, 어떤 여인네들이 죽은 사내들의 얼굴을 씻어주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조의를 표하는 검은 리본을 받았다.” -⌜월간중앙⌟김준태

5월 24일, 상무관에 안치된 60여 개의 관은 태극기로 덮여있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희생된 이들이었다. 희생자들은 전남도청으로 옮겨져 가족들에게 확인된 후 상무관에 안치됐다. 얼굴이 찢어지고 구멍이 나, 신원 확인조차 못 한 시신들이 전남도청과 길거리에 그대로 남았다. 생명이 꺼지고 죽음만 남은 얼굴이 보였다. 뜨거운 열기로 맞서던 그들의 생전 모습이 떠올라 시민들은 분노했다.

▶▶ 전남도청은 시민군의 본부 역할을 했다. 광주 전역에 상황을 알리고, 무기를 보관하며, 시신을 옮기는 장소로 사용됐다.

뜨거웠던 열흘간의 항쟁

시민들은 시민군의 본부이자 상황실인 전남도청에 모였다. 시민군의 활동이 스피커로 광주 전역에 전파됐다. 계엄군의 무력에 맞서 시민군도 무기를 들었다.

“사랑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 박영순

5월 26일 새벽 5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시내로 진입했다. 싸늘한 분위기가 광주에 돌았다. 도청 안 시민군은 맞서 싸울 150여 명만을 남긴 채 다른 시민들을 내보냈다. “광주의 이야기를 꼭 외부에도 알려달라”는 말을 남긴 채. 함께 남은 60여 명은 학생과 청년들이었다. 5월 27일 새벽 2시 30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박영순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분 후 그는 체포됐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을 장악하며 약 1시간 30분 동안 피의 학살극을 벌였다. 이렇게 광주의 항쟁은 10일째에 막을 내린다.

“1980년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은 놀라웠다. (중략) 광주항쟁은 혹독한 독재정권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풍요로운 민주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한국인들이 용감하게 투쟁의 발걸음을 내디딘 사건이다. 이 투쟁은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강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에이브럼 노엄 촘스키

당시 열기와는 사뭇 다르게 국립5·18민주묘지에는 고요한 적막함만이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뜨거운 함성을 알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뜨거웠던 19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한다. 이렇게 5·18 민주화운동은 모두의 마음 속에 남아있다.

글 사진 김수빈 기자
sbhluv@yonsei.ac.kr

김수빈 기자  sbhluv@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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