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 주희」의 공간에서 은폐된 구조적 폭력을 찾다

폭력 상황에서 사회는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한다. 그러나 폭력을 폭력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라면 어떨까. 어떤 폭력은 사회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합법적으로 일어난다. 구성원들은 구조적 폭력 아래 스스로가 피해자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폭력을 재생산한다. 박민정 작가의 「세실, 주희」는 ‘불편한 진실’로 존재하는 구조적 폭력을 일상에서 경험하는 세 20대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기자는 그 실체를 잡기 위해 소설의 배경이 된 명동으로 향했다.

 

▶▶ 사람들은 사회가 만들어낸 미의 기준을 선망하고 추구한다. 명동거리 일대는 비슷한 화장을 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K-뷰티의 메카, 명동
‘아름다움’과 ‘여성’

「세실, 주희」에는 J, 주희, 세실 3명의 20대 여성이 등장한다. 각각 미국, 한국, 일본 사회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이들이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각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구조적 폭력이 드러난다.

주희는 명동의 화장품 가게 ‘쥬쥬하우스’ 매니저다. 쥬쥬하우스는 국내 최대 화장품 편집숍으로, 특히 명동점 규모가 가장 크다. 주희는 화장을 즐기는 ‘코스메틱 덕후’로, 오랜 기간 온라인 화장품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경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매니저 자리까지 올랐다.

기자가 방문한 명동 거리에는 화장품 가게들이 즐비했다. 화장품 가게 간판 위에는 연예인의 얼굴이 거대하게 자리했다. 한국인 여성뿐 아니라 외국인 여성도 그들의 아름다움을 선망한다.
아름다워지려는 여성의 노력은 ‘본능’ 또는 ‘자기관리’로 설명된다. 그러나 일부는 이를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 말한다. ‘여성은 예뻐야 한다’는 통념이 하나의 폭력이라는 것이다. 매일 화장하고,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부끄러워하는 여성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화장한 채로, 비슷한 화장을 한 연예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자는 불편함을 느꼈다.

“나 한국어 공부해야 돼요. 더 잘해야 돼요”

또 한 명의 주인공 세실은 유노윤호를 좋아해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 여성이다. 세실은 쥬쥬하우스 명동점 직원으로 주희와 함께 일한다. 한국 문화를 선망하는 세실은 한국어를 잘하고 싶어 한다. 세실은 주희에게 부업으로 한국어 과외를 해달라고 요청하고, 주희가 제안을 받아들이며 이들은 매주 일요일 세실의 고시원 방에서 수업하기로 한다.

 

충돌하는 ‘한국인’과 ‘일본인’
드러나는 젠더 폭력의 구조

 


“아, 다카키 마모루 상. 내 친구예요. 주희씨 예쁘다던데요.” 주희는 그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세실과 함께 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지하철 안에서도 주희는 내내 그 남자를 생각했다. 왠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험상궂은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처음 세실의 방에 방문했을 때, 주희와 세실은 다툰다. J와의 미국 여행 이후 주희는 ‘예쁘다’는 말을 즐기지 않는다. 미국 문화에 익숙한 J와 달리 미국에 처음 가본 주희는 여행 내내 J에 의존했다. 둘은 ‘마르디 그라(Mardi Gras)’ 축제 현장에 간다. 마르디 그라 축제에는 남성이 여성에게 비즈 목걸이를 주면 여성이 가슴을 보여줘야 하는 풍습이 있다. J는 이 사실을 몰랐던 주희를 남겨두고 다른 친구들과 거리로 나갔고, 혼자 밖으로 나간 주희는 한 무리의 남성에 둘러싸인다. 남성들은 가슴을 보여주지 않는 주희를 둘러싸고 야유와 성희롱 발언을 쏟아부었다. 한국에 돌아온 주희는 그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이 동영상에 박제되어 있었다. 주희의 한 대학 친구가 여기에서 널 봤어, 어서 들어가봐, 하고 다급하게 문자를 보내왔다. ‘yeslut’이라는 사이트 이름을 본 주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친구가 보내준 주소를 클릭하자 사이트의 ‘Mardi Gras’ 카테고리에 게시된 주희의 영상이 떴다. ‘Mardi Gras, nice asian slut 43%’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nice asian slut’. 자신의 여성성이 폭력의 이유가 된 경험 이후 주희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에 뭔가 위험한 게 숨어있진 않는지 불안감을 느낀다. 주희에게 ‘예쁨’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세실은 주희의 외모를 ‘특히 일본 남자들이 좋아할 귀여운 느낌’이라며 칭찬한다. 세실의 다음 말에 주희는 강한 불쾌함을 느낀다.

“주희씨도 성형을 좀 했겠죠? 한국 여자분들은 성형을 많이 하니까요. 보편적으로.”

“한국 여자가 성형을 많이 한다고요? 그러면 일본 여자 대부분은 AV를 찍나요?”



주희의 말을 들은 세실은 울음을 터트린다. 주희와 세실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 여성에게 성형, 일본 여성에게 AV가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논리를 답습하며 서로를 대상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오히려 주희와 세실이 서로 다른 사회에 속해 있기에 상대가 속한 사회의 폭력성을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젠더 폭력이 구조화된 사회에 속한 개인은 일상 속 폭력을 문제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형수술과 AV, 둘 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는 ‘아름다움’은 사회구성원에 내면화되고, 일부 여성에게는 콤플렉스가 된다.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받는다. AV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그 모습을 소비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성형수술을, 일본인은 AV를 큰 문제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희와 세실은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문제에 대해 서로를 거울삼아 어렴풋이 눈치챈다.

 

 

에피파니(Epiphany)의 공간,
평화비 소녀상

 

▶▶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여전히 꼿꼿이 앉아있다.

 

한국 여성과 일본 여성으로서 주희와 세실의 충돌은 계속된다. 세실은 한국어 작문 과제로 외증조모인 사쿠라코가 ‘히메유리학도대’의 지도교사로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는 사실을 쓴다. 소설에서 히메유리학도대는 순결한 여학생만으로 구성된 간호부대로,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할 당시 수류탄으로 집단자살해 순결을 지킨다. 세실은 이에 자부심을 느낀다. 전범을 추앙하기 위해 만들어진 야스쿠니 신사에 외증조모가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전쟁 피해국인 한국 문화를 선망하는, 세실의 정체성 모순을 주희는 간파한다.

이 섬뜩한 모순은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극에 치닫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난 세실과 주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시위에 휘말린다. 무슨 시위인지 물어오는 세실에게 주희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집회’라고만 말한다. 자신의 할머니도 전쟁 피해자라고 말하는 세실에게 주희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세실, 당신의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세실의 할머니는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면서요……


주희와 세실이 일본 대사관 앞 평화비 소녀상 앞에 당도하며 소설은 끝난다. 기자가 일본 대사관 앞을 방문했을 때, 소녀상은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파란색 현수막을 뒤로 한 채 앉아있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금속 눈동자는 진실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 같았다. 일제강점기 일본과 한국은 폭력적 위계관계에 있었고, 두 사회의 구성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젠더 폭력은 형태를 달리했을 뿐 양국의 여성들을 모두 희생시켰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 여성들에게는 종군 위안부가 되기를, 본국 여성에게는 순결한 처녀로 자살하길 기대했다.

시간이 지났지만 문화와 젠더 폭력 구조는 해체되지 않았다. 거대한 폭력 구조 안에서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가 된다. 마르디 그라 축제의 관습을 알고 있으면서 주희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J의 위치에 이번에는 주희가 놓인 것처럼.

폭력이 사회 구조 자체와 결부돼 있다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구인지만 보는 것은 정작 중요한 진실을 은폐한다. 구조적 폭력에서 한 개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으며, 대부분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가해자는 특정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따지는 과정에서 폭력의 근본적 원인인 구조와 문화는 뒤로 숨어 버린다. 아무리 많은 ‘가해자’를 감옥에 집어넣어도, 폭력적 구조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피해자는 다시 생겨난다.

젠더 폭력을 경험하는 이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이는 종종 모순되고 충돌한다. 서로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 성별 등의 정체성은 이들을 가해와 피해의 프레임에 가둔다. 마르디 그라 축제에서 비즈 목걸이를 걸고 온 J 또한 주희와 같은 폭력을 경험했다. 문화를 내면화한 나머지 폭력이라 인식하지 않았을 뿐이다.

주희와 세실 또한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같은 폭력을 경험하지만 모순되는 문화적 정체성으로 인해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 세실이 소녀상에 대해, 모순에 대해 알게 된 후 주희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상이한 정체성은 다양한 폭력 상황에서 사회구성원들을 때로는 가해자, 때로는 피해자로 만든다. 서로 갈등하는 사회구성원들은 차이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질문을 남긴 채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러나 여전히 풀어나가야 할 불편한 진실은 남아있다.

 

주희와 세실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폭력이라는 생각도 잘 들지 않는 폭력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명동과 광화문의 풍경만큼이나 우리 눈에 익다. 바로 곁에 존재하지만, 그렇기에 차라리 외면해버리고 싶은 문제들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연대해야 폭력의 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

 


글 민소정 기자 
socio_jeong@yonsei.ac.kr

사진 정여현 기자
jadeyju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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