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이와 살아남지 못한 이, 『그들의 이해관계』로 보는 세월호

▶▶ 광화문에 위치한 ‘세월호 기억 및 안전 전시공간’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를 함께 기억하고 안전한 사회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고자 지난 2019년 4월 개관했다.

세월호가 침몰했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흘러간 세월만큼 이제는 슬프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곳곳에서 나부끼던 노란 리본도 좀처럼 보기 힘들다. 하지만 슬퍼해야 할 이유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의 ‘부재’
누군가는 당해야 했던 참사

 

다큐멘터리 『부재의 기억(In the Absence)』은 세월호 침몰부터 인양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참사의 현장에 국가는 없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내부보고를 위해서라며 카메라 유무를 계속해서 확인했고, 해양경찰은 인명 구조 자체가 아닌 ‘구조하는 그림’을 신경 썼다. 다른 지시 없이 “선장님께서 빠르게 판단하시라”는 해경의 말에, 선장은 선내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을 남기고 해경 123정으로 탈출한다.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은 사고가 발생한 아침 10시부터 낮 5시까지 관저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승객들은 배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가라앉았다.

결국 서로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국민뿐이었다. 세월호 탑승객 김성묵 씨는 선내에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떠밀려오는 학생을 안고 함께 탈출했다. 김씨는 “해경 구조 헬기는 방송을 전혀 하지 않았다”며 “카메라만 앞에 나와 있을 뿐 구조 요원이 승객들에게 탈출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 없다”고 증언했다. 선체가 가라앉은 후에도 목숨 걸고 실종자를 수색한 이들은 ‘민간’ 잠수사다. 당시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세월호에 들어갔던 민간잠수사 김관홍 씨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지난 2016년 자살했다. 동료 잠수사 전광근 씨는 “국가에서 배가 침몰하기 전 구해야 할 사람들을 구했더라면 민간잠수사들이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고 말했다.

17세기 정치철학자 홉스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제6항 역시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한다. 이에 유족 정부자 씨는 “나는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살아서 세금 잘 내고 자식 잘 키운 것밖에 없다”며 “구해준다고 약속하고 다시 바닷속에 가라앉히는 모습을 보며 이건 아니라고 느꼈다”고 말한다. 국민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지만, 정작 국가는 국민의 생명 보호에 무관심했다.

세월호 생존자들, 유족들, 민간잠수사들은 차가운 분노로 ‘그때 국가는 부재했다’고 증언한다. 국민을 지킬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는 ‘참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지겹다”는 사람들
벗어날 수 없는 ‘이해관계’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온 국민이 함께 슬퍼했던 일이 무색하게, ‘이제 지겨우니 그만 좀 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이들에게 세월호는 타인이 당한 운 나쁜 사고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아직도 진상규명을 하라며 ‘유난’인 이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그 불행을 당한 것이 자신이 아님에 먼저 안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늘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임현 작가의 소설 『그들의 이해관계』에 타인의 불행을 대하는 이 같은 심리가 묘사돼있다. 주인공은 연쇄 추돌사고로 아내 해주를 잃는다. 해주가 탄 고속버스가 사고에 휘말린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절묘하게 사고를 피해간 또 다른 고속버스가 있었다. 그 고속버스를 두고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고로 해주를 잃은 주인공은 이에 분노한다.

‘기적? 기적이라니. 사고를 피하는 게 기적이라면 그렇지 않은 쪽은 무엇인가. 기적의 반대말이 뭐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그게 기적 아닌가? 그러면 뭐, 해주는 그래도 된다는 말인가? 그게 다 상식적으로 일반적인 일이었다는 건가? 그냥 그럴 수 있다는 사고였다는 거야, 뭐야.’

피할 수 없는 재난이 일어났을 때, 인간은 늘 자신을 먼저 생각한다. 자기 자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고를 피해간 것에 안도한다. 그리고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 반대편에는 ‘살아남지 못한 이들’이 존재한다. 마치 이 세상에 행운과 불행의 총합이 ‘0’이고, 우리가 행운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불행해야 한다는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 해주는 사고를 당했지만, 해주의 불행이 사고를 피한 이들에게는 행운이 된 것처럼 말이다.

국가의 안전망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참사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그 배에 탔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 참사를 당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남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누군가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쉽게 잊는다.

 

살아남은 우리,
애도해야 하는 이유

 

‘뭘? 내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찾을 수 있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에 가까웠고 책임질 만한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인 한, 다른 이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슬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인공은 해주를 떠나보내기 전 크게 다퉜던 일, 잠시 쉬고 오겠다는 말에 서둘러 고속버스를 태워 보냈던 일을 후회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어떤 행동도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아내의 죽음에 ‘내 책임은 없다’고 생각해버리는 주인공조차도,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닌 해주가 죽어야 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당시 사고를 피해갔던 고속버스의 운전사를 찾아간다. 멱살이라도 잡을 작정으로 갔지만, ‘어딘가 절실해 보이는’ 운전사의 모습에 주인공은 당황한다. 주인공은 고속버스 운전사로부터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고속버스 운전사는 행운과 불행의 이해관계에서 두 차례나 행운을 누린 인물이다. 그는 고속버스 사고가 일어나기 전, 동료 시내버스 기사 오경남 덕에 정리해고를 피해 가는 또 한 번의 ‘행운’을 경험했다. 오경남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 탓에 수차례나 버스 노선을 이탈하는 사고를 친다. 당시 경영난을 겪던 운수회사는 이를 빌미로 오경남을 정리해고한다. 고속버스 운전사는 이에 안도하면서도, 그런 스스로에 죄책감을 느낀다. 오경남의 해고가 고속버스 운전사의 잘못은 아니지만, 오경남의 불행으로 그가 행운을 누렸기 때문이다.

해주의 사고가 있던 날 고속버스 운전사는 오경남과 같은, 노선을 이탈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그는 충동을 이기려 애쓴 나머지, 한 여자를 휴게소에 두고 버스를 출발시키는 실수를 저지른다. 뒤늦게 이를 알아챈 그가 여자를 태우러 휴게소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고속버스는 연쇄 추돌사고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다른 고속버스를 대신 타고 정확히 사고가 일어났을 시간에 맞춰 출발한 상태였다. 어쩌면 해주일지 모르는, 한 여자의 불행이 버스 운전사와 승객들에게는 ‘다행’이 된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버스 운전기사는 해주와 주인공에게 미안해했다. 주인공과 해주 부부의 불행이 그에게 행운이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몰랐거든요. 일이 그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나는 다 미안해지더란 말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던 유가족과 국민의 심정도 마찬가지다. 살아남은 우리 중 누구도 참사를 예견할 수 없었고, 참사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당시 유가족들과 국민은 희생자들에게 ‘미안하다’며 눈물 흘렸다. 사회적 참사의 불행을 단원고 아이들을 비롯한 탑승객들이 대신 당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다.

‘울먹이는 남자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나는 그와 마주 앉았다. 마주 앉아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그런다고 내가 더 괜찮아지는 것도 아닌데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다독여 주었다. 여전히 해주는 보고 싶고, 그립고 아픈 것은 조금도 줄지 않았으나 그때는 그런 것들이 몹시 필요해 보였다.’

『그들의 이해관계』를 쓴 임현 작가는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이타적인 존재”라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문득 전해져올 때가 있다”고 말했다. 소설 끝자락에서 주인공은 울먹이는 고속버스 운전사와 마주 앉아 등을 두드리며 위로한다. 누가 죽었고 살아남았고 하는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위로를 건넨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임 작가는 세월호를 애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유가족 당사자들의 슬픔이 끝나지 않았고, 그들에게 우리의 애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며 “우리 입장에서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들이 유가족 당사자에게는 큰 의미가 된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겐 ‘유난’으로 비치는 일이 유가족들에게는 큰 위로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 오준영 군을 잃은 유가족 임영애 씨는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국가가 왜 구조를 하지 않았는지 진상규명이 되지 않는 한 몇 년이 지나도 4월은 잔인한 달로 남을 것”이라며 “작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행동이 유가족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당장 내가 먹고살기도 힘든 사회에서 다른 이를 연민하고 애도하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다. 다른 이의 입장에 일일이 공감하기엔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겪을 수 있었던, 또 앞으로 겪을 수 있을 불행을 지금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입장에 공감하고 함께 슬퍼하는 시간은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글 민소정 기자
socio_jeong@yonsei.ac.kr

사진 정여현 기자
jadeyju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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