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인 연구원이 말하는 숙명여대 입학논란 사건

지난 2개월 동안, 한국 사회에는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합격생 A씨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쏟아졌다.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이를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을 고민하는 계기로 삼았고, 혐오 표현 연구자들의 현상 분석과 대책 마련도 이어졌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 의제 연구자’는 이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봤을까.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루인 연구원에게 숙명여대 사건의 함의를 물었다. 그는 A씨에게 쏟아진 혐오 표현을 강하게 비판하며 “모두에게 이 사건과 연루돼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A.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에서 공부하고,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부설 기관인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는 루인이다. 트랜스젠더 의제와 관련해 연구하고 활동하고 있다.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는 지난 2013년, 트랜스 인식론과 트랜스 정치학으로 세상을 재해석하고자 설립했다. 구성원이 사실상 혼자뿐이지만 ‘연구소’라고 규정함으로써 트랜스젠더 의제를 연구하는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Q. A씨가 결국 입학을 포기했다. 트랜스젠더 의제 연구자로서 이번 사건을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A. ‘이번 일이 왜 특정 사건으로 구성됐을까?’라는 의문부터 들었다. A씨는 지난 2019년 10월에 이미 법원의 성별 정정 허가를 받았다. 법적 여성의 신분으로 숙명여대에 지원해 합격한 것이다. 이 일은 숙명여대에 트랜스젠더가 합격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알려졌는데, 이렇게 묻고 싶다. 여성이 여대에 합격한 게 기삿거리가 될 수 있는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문제 없는 일이 기삿거리가 됐다.

이를 보며 한국 사회가 트랜스젠더를 스캔들로만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학을 신기한 일처럼 여기는 것이다. 물론 최초 보도한 기자는 좋은 의도였을 것이다. A씨가 취재에 응한 것도 성전환 수술 후 전역 조치를 당한 변희수 하사를 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후 보도에선 A씨의 의도가 사라지고 가십거리로만 다뤄졌다. A씨가 입학을 포기할 때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한국 사회가 트랜스젠더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Q. A씨는 터프*를 표방하는 학내 구성원의 반대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입학을 포기했다. 생물학적 여성만이 ‘진짜 여성’이라는 게 터프의 핵심 주장이다. 이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표현은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여성 억압체계를 반복,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여성 혐오 표현이기도 하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생물학적’이라는 표현은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여 왔다. ‘여성은 육아에 적합하도록 태어났다’나 ‘남성은 원래 폭력적이다’ 하는 말들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생물학적으로 정해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체계가 사회문화적인 구성물이라고 끊임없이 말해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돌연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기 위해 생물학적 여성을 강조했다. 다시 과거의 억압체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기준 자체가 모호한데 그것이 실제인 양 믿는 것도 문제다. 몇 해 전, 한 페미니스트 예술 모임의 전단지를 본 적이 있다. 자격 조건으로 XX 염색체가 적혀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염색체가 무엇인지 확인해본 사람이 몇 명인가 되는가. 내 친구나 이웃의 염색체는 알고 있나?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의 염색체가 XX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것인가? 실제로 성염색체와 생물학적 특징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데도 여성은 XX 염색체를 가질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확인하고 의심해야 할 사항을 당연하게 인식하며 여성을 염색체 단위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또한, 여성을 염색체 단위로 동일하게 만듦으로써 동질적인 집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도 모든 여성이 같은 경험을 겪는다고 말할 수 없다.

 

Q. 터프는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폭력을 겪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간주한다. 이 논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말도 안 되는 논리다. 그들이 말하는 여성은 도대체 누구인가. 모든 여성이 동일한 방식으로 억압받는가. 여성들 사이에서도 경험적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 선주민 비장애 여성이 겪는 억압체계는 장애 여성이나 이주민 여성이 겪는 것과 다를 것이다. 서로 다른 요소가 교차하며 만들어진 다양한 억압체계가 여성들에게 작용하는데, 이 차이를 부정하는 논리다. 여성을 동질적인 집단으로 만듦으로써 다른 경험을 가진 여성을 여성 바깥으로 추방해버리는 주장이다.

지난 2001년, 하리수 씨가 데뷔했을 때 그를 부정하려는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이 펼친 논리가 있다. 하리수 씨는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없으므로 여성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 말에 가장 분노한 집단 중 하나는 장애 여성 집단이었다. 그들은 ‘장애아를 낳는 것보다 낙태가 낫다’는 언설로 끊임없이 임신 및 출산을 부정당해왔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려는 의도였지만 장애 여성, 불임 여성, 임신 및 출산을 선택하지 않은 여성 등 수많은 여성이 여성이 아닌 존재로 추방됐다. 이처럼 누가 ‘진짜 여성’인지 논하게 되면 결국엔 아무도 여성이 될 수 없게 된다.

최근에는 기혼여성과 남아를 양육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도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배제하는 운동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의문스럽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혐오를 생산하는 정치학이 아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배제의 논리는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비트랜스젠더 여성의 다양한 삶을 삭제한다는 점에서 반페미니즘적이기도 하다.

 

Q. A씨가 입학하면 여대의 안전이 침해당한다는 주장이 유독 거셌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 공간에 위협이 된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A. 불안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다. 근거 없는 불안들이 소수자 혐오를 강화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지난 2018년 예멘 난민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마치 예멘 난민 때문에 한국 사회에 성폭력 사건이 처음으로 발생할 것처럼 이야기됐다. 그 결과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적대와 혐오가 조장됐다. 이번 숙명여대 사건도 마찬가지다. 트랜스젠더 여성에 의해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 없이 ‘불안하다’, ‘위험하다’는 말만 반복됐다. ‘불안’이라는 개념이 기존의 권력을 강화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매개로 작용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소수자도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한 명의 잘못을 모두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일부의 이야기를 집단화해 적용하는 것은 소수자를 통제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내가 만난 여자는 꽃뱀이야. 그러니까 모든 여자는 꽃뱀이야”처럼 여성 혐오가 생산되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은 여성 혐오가 만연한 지금의 사회에서 매우 위험하다.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생물학적 여성으로만 구성된 공간이 진정한 안전을 보장하는가? 아니다. 균질적인 공간은 가장 폭력적인 공간이다. 기존의 질서에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문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애 규범적인 사회에서 성 소수자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 등이 결함 있는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Q. 트랜스젠더 여성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충실히 따르면서 페미니즘 운동을 저해한다는 주장도 있다.

A. 비난을 위한 비난이 아닌가 생각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페미니즘을 후퇴시킨다고 주장할 때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매우 여성적인 모습으로 상상한다. 반면에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주장할 때는 우락부락한 덩치의 위험한 존재로 상상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양가적인 이미지를 상정한 상태에서, 둘 중 하나의 모습으로 그때그때 비난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모순적인 논리지만, 실존하는 트랜스젠더를 상상 속 존재로만 대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또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성을 취하면 페미니즘에 반한다고 비판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따르지 않으면 ‘가짜’가 아닌지 의심한다. 만약 하리수 씨가 짧게 깎은 머리에 가죽 재킷을 입고 나왔다면 사람들이 그를 여성으로 받아들였을까? 남자가 이상한 소리한다고 했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에게 요구되는 성 역할 규범은 그대로 둔 채 계속해서 개인만 비난하는 셈이다.

 

Q. 그러나 일각에선 이번 사건을 터프와 트랜스젠더 사이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이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

A. 숙명여대 사건을 일군의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의 대립으로만 보는 태도는 여대와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를 재생산하게 된다. 숙명여대 내에 혐오 표현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지 않나.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지지 성명도 많았다. 그런데 마치 반대만 존재했던 것처럼 이야기하며 여대에 대한 비하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사건을 예로 들며 페미니즘을 혐오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은 수많은 사람을 구경꾼으로 만들며 문제 해결을 불가능하게 한다. 터프를 비난하는 것으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그들의 주장이 나올 수 있었던 사회적 토대를 살펴야 한다. 이 토대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의 자기반성이 없다면 폭력과 배제는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나 자신이 이 사건에 연루돼있다고 인식하며 함께 사유해나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Q. 숙명여대 사건은 트랜스젠더의 교육권이 침해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트랜스젠더가 겪는 일상적인 차별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A. 최근에 주목받는 의제로 투표권 문제가 있다. 선거인명부에 표기된 법적 성별과 신분증의 사진이 선거 당일 외모와 불일치했을 때, 트랜스젠더는 본인이 맞는지 의심받게 된다. 신분을 부인당하며 투표권 행사 자체를 거부당하기도 한다. 투표를 하더라도 신분증을 도용한 사람으로 의심받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이후의 투표권을 행사하기 힘들어진다. 성별 이분법에 따라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의제로는 화장실 문제가 있다. 단지 트랜스젠더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화장실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사회가 규정한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남자 화장실에 머리 긴 남성이 들어가면 흠칫흠칫 놀라는 사람이 많다. 여자 화장실에 머리 짧은 여성이 들어가면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 트랜스젠더가 아니더라도 성 역할 규범을 따르느냐의 여부에 따라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지 결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화장실은 성 역할 규범을 충실히 이행하는지 검열하는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다.

트랜스젠더는 이성애 체제의 성 역할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특히 문제가 된다. 화장실은 공적 영역에 진출할 수 있는 사람을 규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실외에 이용 가능한 화장실이 없다면, 장시간 외출하기가 힘들어진다. 공공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지와 이어지기 때문에 화장실은 ‘사회에 적절한 구성원’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장애인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다.

 

Q. 대학 내 수많은 트랜스젠더 학생이 존재한다. 트랜스젠더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대학 본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A. 만약 숙명여대와 같은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면 대학 본부가 혐오를 중단하라는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대학 본부에는 학교 구성원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차별과 폭력을 방지할 책임이 있다. 인권 정책 수립, 인권 강의 개설 등을 통해 차별에 대항하는 학내 기관을 설립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이 왜 차별인지 생각하게 하는 지속적인 교육과 함께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그들이 소속감과 연대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난 2019년 연세대에서 있었던 ‘연세정신과 인권’ 강의 논란을 보며 많이 아쉬웠다. 연세대는 2020학년도 입학생부터 젠더·아동·장애·환경·난민 등 13개 주제로 구성된 인권강의를 의무적으로 수강하도록 했다. 그런데 젠더, 난민 주제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외부 세력의 반발에 부딪히자 필수가 아닌 선택 교양으로 운영하겠다고 방침을 변경했다. 해당 강의를 선택 교양으로 지정한 것은 외부인의 목소리에 못 이겨 구성원의 위험을 방치하겠다는 결정이었다. 차별과 폭력이 발생했을 때 교육자와 교육기관이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있다. 연세대에 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터프(TERF) :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급진 페미니즘(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의 약어

 

 

글 김병관 기자
byeongmag@yonsei.ac.kr

사진 양하림 기자
dakharim0129@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