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리나 사회부장 (불문·18)


우린 모두 각개전투 중 


나는 광화문 근처에 산다. 광화문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없이 광화문에 드나들었지만 나는 학보사 기자가 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외침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남의 일’이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 광화문 지하철역을 지나던 나는 한 여성에게 붙잡혔다. 옆에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 몇 분이 핑크색 판넬을 들고 전동휠체어에 앉아있었다. 장애등급제 폐지 반대, 중증장애인, 사각지대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말에 멍하니 서있었다. 속으로는 집 가는 길을 생각하며 고개만 대강 끄덕였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마음에도 없는 “잘 알았다”는 말로 상황을 무마하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리를 뜨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결되겠지. 나 하나 잘 알아들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 후 몇 년동안 핑크색 종이배가 가득한 그 캠페인은 광화문역에서 같은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이를 나는 보지 못했다.

 

때로는 같이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장애인 활동보조 제도 아이템을 취재하면서 지난 여름 장애등급제가 폐지된 이후 중증장애인들이 제도에서 소외되고 더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득 몇 년 전 광화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봤던 판넬 속 이야기들이 이 내용이었구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 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추운 겨울 광화문 역에 있던 사람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멍하니 서서 고개만 끄덕였던 수많은 내가 스쳐갔을 뿐이었다.

학보사 기자가 아니었더라면 나 역시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갔을 문제였다. 그때 똑똑히 알았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만 있을 때는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문제는 해결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 목소리를 들어줘야 사회는 변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까. 내가 그랬듯 그것은 그저 ‘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제까지 남의 일이었던 것들이 오늘은 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나는 동물을 무서워했다. 동물의 생명권, 동물 학대는 다 남의 문제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반려동물과 함께 하게 되면서 동물 보호는 내 문제가 됐고 유기동물은 나에게 발생할지도 모르는 이슈가 됐다. 비단 동물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수자라 여기고 외면하는 모든 타인의 문제들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저희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좀 전해주세요” 취재하며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아무리 외쳐도 듣는 이가, 듣고 전하는 이가, 듣고 전하고 공감하는 이가 없다면 바뀌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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