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운 총무국장 (철학·17)

내가 17학번으로 입학한 이후 세 번의 봄을 더 지낼 때까지 총학생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총학생회가 나오기까지 진행된 3번의 선거 중 한 번은 먼발치에서 파행에 치닫는 선거를 무심하게 관전했고, 나머지 두 번의 선거는 연세춘추 기자로 직접 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면서 경험했다. 삼세번 끝에 내가 학교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총학생회가 생겼다.

약 2년만의 비대위를 뚫고 결성된 총학생회는 열심히 일했다. 그동안 산적해있는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전(前) 총학생회장은 말했지만 기실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어떻게든 피력하려는 총학생회의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학생회'라는 단어만 들어도 고리타분한 인상을 주는 이 시대에서 총학생회는 자기 존재 이유를 학생들의 편의와 복지에서 찾았고 그래야만 했다. 더 이상 과거 운동권 학생회처럼 어떤 하나의 의제를 끌고 갈 필요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와 사고는 '총(總)'이라는 관형사 하나 아래로 묶이지 않는다. '총'이라는 거대 서사가 몰락하고 남은 자리에는 각자만의 다양한 서사가 대신하게 됐다. 이러한 소규모 서사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상호 간 의견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수 조건임은 자명하다. 자유민주주의의 다양성 보장이 다름 아닌 상호 간 이해와 존중을 전제로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연세 학생사회에서는 총학생회가 학생복지처로 변모하는 '총'의 몰락과 모순되는 또 다른 '총'의 몰락이 있었다. 총여학생회 폐지이다. 총여학생회는 약 30년 전, 학내 여학우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하지만 지난 2019년 1월 총투표를 통해 총여학생회는 사라졌다. 우리는 하나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총학생회의 복지화는 언뜻 다양성의 시대를 비추는 듯하지만, 한쪽에서는 다양성을 말소시키는 투표가 가결됐다. 학내에서 하나의 다양성을 담당하고 있었던 소규모 서사가 다수결로 인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모순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연세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이 아닌 다수에게 '검증된' 다양성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검증된'이라는 단어는 이런 뜻이다. 상호 간의 이해와 존중이 아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정된 범위 안의 다양성이라는 것. 타인을 향한 배려와 이해가 아닌 자기만의 편협한 이성에 근거한 '한정된 범위'라는 것. 이러한 검증된 다양성은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고 기만하는 요소이다. 총여학생회의 특정 선본 잘못을 빌미로 해당 선본의 퇴진이 아닌 총여학생회의 폐지를 주장한 순간, 끝내 총투표로 총여학생회 폐지를 가결했던 순간들은 그래서 연세 사회의 치욕스러운 역사로 분류될 것이다. 학우들이 제 손으로 다양성과 자유를 포기하고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획정지은 그 날의 결정을 말이다. 

5학기, 2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연세춘추 기자라는 직함으로 학생사회에 참여했던 일원으로서 나는 2개의 총의 몰락을 지켜봐왔다. 현재도 다르지 않다. 지금의 총학생회도 이전보다 비권적 색채가 더욱 짙어졌고, 여전히 익명 커뮤니티 상에서는 특정인과 특정 가치관에 대해 무차별적 비난이 가해지고 있다. 볼테르가 의견의 동의 여부를 떠나 "당신이 말할 자유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는 말을 한 지 300년이 지났지만 나아진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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