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소마』로 고통 너머 삶의 가능성을 보다

 

당신의 연인이 불타고 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이 순간 당신은 무얼 할 수 있을까? 달려가 연인을 구할까? 아니면 그저 공포에 질려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미드소마(Midsommar)*』의 주인공 대니는 다르다. 오히려 재가 돼가는 연인을 보며 미소 짓는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섬뜩한 장면에 그리스 비극이 녹아있다.

 

당신은 공감할 수 있나요?

 

대니는 불행하다. 얼마 전 동생의 자살로 부모님까지 잃었는데, 연인과의 관계도 위태롭다. 대니가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때, 친구가 대니와 그의 연인 크리스티안을 ‘미드소마’ 축제에 초대한다. 90년에 한 번, 9일 동안 열리는 호르가 마을의 축제에서 대니는 잠시나마 현재의 고통을 잊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축제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기대는 무참히 어긋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 절벽 위에서 노인 둘이 투신했을 때였다. 큰 충격을 받아 마을을 떠나려던 대니에게, 호르가인들은 노인이 돼 자살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은 자신들에겐 자연스러운 의식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호르가인들의 설득으로 결국 마을에 남은 대니는 그들의 친절함에 차츰 마음의 문을 연다. 함께 춤추고 감정을 공유하며 대니는 호르가로 녹아든다. 그리고 축제 말미, 축제의 여왕으로 선발된 대니는 망설임 없이 크리스티안을 희생제물로 선택한다. 처참한 죽음을 맞은 크리스티안을 바라보는 대니의 마지막 웃음이 압권이다.

『미드소마』의 관객들이 이토록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대니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렇다. 영화의 후기에는 대니가 너무나 공감된다는 말로 가득하다. 영화에 ‘힐링’, ‘심리치료극’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후기도 많다. 그들은 어떻게 대니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찾기에 앞서 대니와 관객의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둘 사이의 교집합은 ‘고통’이다. “모든 삶은 고통이다 (Alles Leben ist Leiden)”라는 쇼펜하우어의 명제처럼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겪는다. 고통에 대한 공통된 경험은 공감을 자아낸다. 이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예술로 승화한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다.

 

그리스 비극,
참상 이면의 모방으로 관객을 현혹하다

 

그 애들은 무조건 죽어야 해요. 필요하다면
생모인 내가 그 애들을 죽일 테야.
자, 가련한 내 손이여. 칼을 들어라!
―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 (1236-44)

메데이아는 배신한 연인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살해했다. 결국 이아손도 메데이아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된다. 잔인한 이야기다. 그리스 비극에는 이처럼 탁월한 능력을 갖춘 수많은 인물이 고통 끝에 비참하게 몰락한다. 그 잔혹함은 마치 호르가인들의 축제와 같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비극을 사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오늘날 ‘비극학’이라고도 불리는 『시학』을 통해 비극을 찬양한다. 그에 따르면 비극은 사람의 행위를 모방한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의도한 목적을 지닌다. 따라서 비극은 등장인물이 각자 의도에 따라 행동한 결과로 전개된다. 『메데이아』의 이아손은 결국 자식들을 모두 잃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비참한 말로를 맞는 이유는 뚜렷하다. 자신에게 헌신한 메데이아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메데이아처럼 통쾌한 복수를 꿈꿨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인들은 메데이아와 이아손을 철저히 모방한 배우가 직접 노래하고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꼭 자신의 바람대로 행동하는 작품 속 인물들에 쉽게 빠져들었다.

이처럼 모든 ‘비극적 인물’은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이입의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 같은 이입을 ‘카타르시스’라고 설명한다. 더불어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는 사건이며, 바로 그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고 서술했다. 조대호 교수(문과대·서양고대철학)는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배설’이라는 의학적인 해석 또는 ‘정서의 순화’라는 윤리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관객은 인물에 이입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때로는 직접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다.

 

불우한 주인공에서
‘비극적 인물’로 거듭나다

 

『미드소마』의 관객들은 비극을 관람한 고대 그리스 사람들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호르가인들에게 위로를 받던 대니가 관객을 달래는 ‘비극적 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니체는 고통에 대한 고찰을 통해 해답을 제시한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고통과 불가분의 관계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고통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다.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고통을 긍정하라고 제안한다. 바로 ‘디오니소스적 도취’다. 디오니소스의 포도주에 취한 것과 같은 도취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마저 잊는다. 도덕을 비롯한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고양된 상태에서 인간은 고통마저 긍정한다. 의식적인 것도, 목적에 따른 것도 아니다. 도취를 경험하는 사람은 이유 없이, 즐겁게 이에 빠져든다.

대니는 가족을 잃고 연인에게도 외면받아 홀로 고통받는다. 니체는 대니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선 도취를 겪어야 한다고 진단한다. 대니에게 디오니소스의 포도주가 돼 준 것이 바로 호르가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호르가인들과 함께 추는 춤은 대니에게 진심 어린 위로가 된다.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춤에 한껏 도취돼, 대니는 현실의 고통을 잊고 호르가인들과 어울린다. 종국에는 자신의 전부였던 연인마저 호르가를 위한 제물로 바치기에 이른다. 분명한 비극이지만, 대니는 고통을 극복하고 삶을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이 시점에서 대니는 완벽히 메데이아로 거듭난다. 대니와 메데이아는 고통 앞에 무너지지 않았다. 고통을 극복한 두 ‘비극적 인물’에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작품 속 메데이아를 완벽히 모방한 배우에 이입해 그의 복수극에 통쾌함을 느낀 고대 그리스 사람들처럼, 『미드소마』의 관객들은 대니와 동일한 호흡으로 영화를 따라가며 같은 몰입을 경험한다.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 누구보다 찬란하게 미소를 짓는 대니를 보고, 그와 같은 통쾌함과 후련함을 경험할 수 있던 것이다.

 

고통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삶은 그저 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니체는 우리에게 이런 삶까지 긍정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미드소마』, 그리고 비극과 같은 예술이 우리가 덧없는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취를 선물할 수 있지 않을까?

 

*미드소마(Midsommar): 스웨덴에서 매년 6월에 열리는 하지 축제

 

 

 

글 이현진 기자
bodo_wooah@yonsei.ac.kr

<사진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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