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문학상(시 분야)] 심사평
 

정명교
우리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

 

투고량이 유례없이 적었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급냉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스럽다. 투고작들엔 여전히 젊은이의 방황이 흥건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시는 감정을 다스리는 기제이지 그걸 쏟아 붓는 사발이 아니다. 그런데도 젊은 감성의 분출력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해서 제풀에 못이겨 손을 놓아버리거나, 그걸 강제로 제어하자니 상투적인 혹은 정반대로 억지스런 비유에 의탁하곤 한다. 그나마 시적 긴장을 유지한 작품들을 절제의 최소한의 노력을 보여주거나 현실과의 조응력을 확보한 것들이다. 「사춘기」는 한 불우한 여인의 극단적인 몸부림과 자멸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경우가 있나,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긴 하면서도 제목의 이중적 의미층과 자신의 불우를 주변을 향한 분풀이에서 자신이 감당할 운명으로 돌린 것은 ‘인간다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였다. 「생일」은 힘이 없어서 매번 박탈당하고 마는 삶을 사는 ‘벌거벗은 생명들’의 모습을, 그들의 입장에서 시니컬한 어조로 자조하고 있다. 자학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생이 자포자기로 끝장나기까지 얼마나한 필사적인 노력이 부어지고 있었던가를 실감나게 느끼게 해준다. 「눈먼 시계는 멈추어 있다」는 청춘에게 쉽게 닥치곤 하는 상처에 대한 감상적인 되뇌임이다. 감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그것을 객관화하고 형상화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걸 감각적으로 추체험케 하는 솜씨가 있다. “무모한 청춘은 모르고 오로지 / 무정한 달만이 아는 이 때” 같은 대조 구문은 좋은 예다. 문학상은 격려와 잔치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행사다. 「눈먼 시계는 멈추어 있다」를 당선작으로 뽑으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띄운다.

 

[박영준 문학상(소설 분야)] 심사평
 

이석구
우리대학교 영어영문과 교수


소설 부문 지원작 중 다수가 사회적 불의나 집단의 비이성과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해있는 현실의 일각이 이처럼 지원자들의 창작에서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비록 그것이 자조적인 형태의 표현일 때조차도, 젊은 세대의 앙가주망 정신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고 여겨진다. 당선작 『스탠바이』는 주인공 윤의 군(軍) 생활 적응 사례를 통해, 최적자(最適者)의 생존력을 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우의적 수준에서 비판적으로 극화하고 있다. 리바이어던의 뱃속에서 윤이 보여주는 적응은 비판적 성찰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대가로 치렀다는 점에서, 소시민적 안정을 위해 비순응주의를 포기한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요,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최고가로 팔아야 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회고록이다. 그러니 윤의 성공은 곧 비판적 이성의 실패요, 그의 환희에 찬 생존은 공동체적 믿음에 대한 사망선고를 의미한다. 부조리와 맞닥뜨렸을 때 건강한 정신이 보이는 알레르기 반응을 질병에 시달리는 육체로 비유하는 패러독스, 두 개의 독립 서사 즉, 익명의 일인칭 화자의 독백과 윤의 입대에 관한 전지적 화자의 스토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어 한편의 서사로 녹여내는 정교한 화법 등을 고려했을 때, 이 작품은 동시대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탁월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수작이라 판단된다. 비록 당선작으로 선택되지는 못했지만, 언어와 주체의 문제에 깊이 천착한 사유를 놀라운 말솜씨로 풀어낸 『혼외자』, 사실주의를 발로 걷어찬 『끝이 없어서 아이는 꿈을 꾸지 않고 그래서 끝이 없다』도 조금 더 다듬으면 좋은 글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외에도 『소각장』, 『켈로이드』, 『향해 걸음을 딛고서』도 탄탄한 서사적 구성력을 보여주는 수준 있는 글쓰기임을 꼭 전하고 싶다.

 


[오화섭 문학상(희곡 분야)] 심사평
 

윤민우
우리대학교 영어영문과 교수
 

올해 연세문화상 희곡 부문에서 수상작이 선정되지 못했음은 실로 유감이다. 더욱이 응모작이 단 한 편에 그쳤다는 점은 더욱 그러하다. 우선 『달빛 가려진 마을』이라는 제목의 응모작을 촌평해 본다. 이 작품에서 칭찬할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응모자는 나름대로 독특한 소재를 채택했고, 다기한 역사적 상황을 작품에 집결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역사적 맥락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짜임새가 빈약하다는 느낌은 든다. 뱀과 무당, 나병환자촌, 한국전쟁과 빨치산, 일제 강점기와 한국 동란 등이 시기적으로도 서로 잘 맞지 않은 듯하며, 그 요소들이 유기적인 접합에 이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제 의식이 치열한 편은 아니며,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 및 인물들의 행동 동기가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는 점에 관해서도, 본 심사자는 흡족지 못했다. 또한 본 작품의 작가는 사건의 관찰자적 시점을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는 사건에 접근하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대학생활의 신변잡기나 방황 등을 묘사하는 식의 출품작과는 격의 차이가 분명한 것은 사실이다. 잘 다듬으면 수작이 될 수도 있을 이 응모작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다.

올해의 연세문화상 희곡 부문에 보내진 유례없이 적은 투고량을 접하며, 현재 대학생들에게 문학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신춘문예’ 제도에 대한 열정이 있던 때가 있었다. 큰 신문사들이 문학상을 제정했고, 봄이 되면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일년간 준비했던 시, 소설, 희곡, 평론 등을 응모했다. 여기서 수상자는 공식적인 문인으로 행사할 라이선스를 부여받는다. 수많은 젊은이가 갈고 닦은 작품들을 응모했고, 대부분 한 번의 시도에 그치지 않고, 재수, 삼수, 오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새해 벽두의 주요 일간신문의 문화란 전면을 차지하던 이 제도는 문예 창작의 사법고시라 할 만했고, 문학 지망생들의 축제이기도 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주요 문예지를 통해 기존의 명망있는 작가들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 권력이 된 이름 높은 문예지 혹은 작가의 문하생이 돼, 그들에 의해 추천을 받는 것이 공식적 문인이 되는 또 다른 통로였다. 이는 수련을 겪어 중간 단계의 장인으로 데뷔하는 도제 방식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방식이 바람직한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 제도는 부작용을 양산했으며,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서 생각해 보려는 것은 왜 ‘그때에는 그러했고, 지금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왜 그때에는 수많은 문학 지망생이 있었고, 요즘은 아닌가? 과거에는 연세문화상이 ‘백양로의 신춘문예’로 기능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왜 그렇지 못한가? 현재의 대학생들로부터 자유로이 생각하고 표현해 보고자하는 욕구를 빼앗아 가는 삶의 조건 때문인가? 대학에 들어오는 방식에서도 그러했지만, 취직을 하기 위해서도 수많은 ‘스펙을 쌓아야’ 하기 때문인가? 학생들의 관심을 오로지 이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 현재의 취직난이 낳은 문제점이라는 것은 널리 인지되고 있다. 더욱이 회사로서는 회사가 필요로 하는 기술 및 업무능력을 대학에서 배우기를 바라고 있어, 학생들로서는 그러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한가하고 나태한 생활방식으로 쉽사리 인식되곤 한다. 그런데,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희곡으로 말하자면, 근래의 달라진 대중문화 매체와 긴밀한 연관이 있어 그 파급효과를 실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장르임을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 연극, 영화, 뮤지컬 등 대중문화의 수준은 고급문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연극이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고, 우리의 영화가 국제적으로 최고 수준임을 인정받는 근래의 성과에 반영돼 있다. 오늘날의 달라진 대중 매체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연극본능을 실생활에서 응용할 다른 방법을 여전히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올해로 연세문화상은 60회를 맞이한다고 한다. 연세는 결코 문화 활동에 나태하지 않았다. 이름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연세대는 수많은 걸출한 희곡작가를 배출하였고, ‘오화섭 희곡상’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희곡을 귀중히 여기는 교수님들이 계셨으며, ‘연세극예술연구회’라는 연극 동아리를 통해 자발적으로 배우 및 연출가를 양성해 왔다. 지금은 그 전통이 하향선을 그리고 있지만, 예술적 삶의 조건을 그리는 곡선은 상향할 때가 올 것이다. 예술적 욕구를 향유하는 행위는 본능적이며, 그러기에 예술 활동은 끊어진 적이 없었다. 다만 그 방법이나 양태만이 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특별히 높은 예술적 욕구를 타고난 사람들은 이를 이기지 못해 자발적으로 문예활동에 뛰어들 테지만, 그 정도로 예술적 욕망이 절실하지 않은 연세의 학생들도 캠퍼스에 거주하는 동안 그러한 예술적 충동을 충족시키는 활동을 시도해 보기를 권유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하는 예술 활동의 본능을 현실태로 바꾸는 일이며, 이는 우리가 현실사회에 몸과 정신을 빼앗기기 전에 가장 효과적으로 시도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캠퍼스 생활 동안의 예술 활동은 전인격체로서의 인간이 가진 예술적 본능을 실현하는 일이며, 부차적으로 이는 치열하리만큼 합리적인 오늘날의 경제활동에서도 그 응용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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