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준 (정외·18)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화 『벌새』 속 등장인물 김영지 선생님은 세차게 흔들리는 은희에게 이 말을 건네며 위로의 뜻을 전한다.

선생님의 말대로 우리의 행복과 슬픔 속엔 늘 누군가가 있다. 인간 덕분에 행복하고, 인간 때문에 상처받으며, 우리는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인간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며 다가가면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독하게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는 채로 살아간다.

나 또한 사람 ‘덕분에’ 행복을 느꼈고, 수없이 삶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 내 손을 잡아준 것은 따뜻함이 살아 숨 쉬던 ‘인간’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사람 ‘때문에’ 가 더 와닿는 세상으로 느껴진다. 슬픔과 아픔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저마다의 아픔이 가득해 누군가의 아픔에 귀 기울일 여유는 없어 보인다. 순수하고 여린 마음으론 도저히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사랑이 아닌 혐오가 넘실거리는 사회, 순수가 아닌 위선이 지배하는 사회. 상대를 구분 짓고 미워하며 살아간다. 자신은 언제나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으며 누군가를 지우고 배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써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지금 우리 세상일까. 나도 그런 세상 속에 위선 한 움큼을 던지던 구성원 한 명이었을까.

이런 세상 속, 순수함을 잃지 못한 사람들은 “철 좀 들어라”라는 말을 들으며 강해지길, 상처를 주고받는 것에 무뎌지길 강요받는다. 강요를 버티기 힘든 어떤 여린 마음은 세상을 떠날까 쉴 새 없이 고민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기를 반복한다. 반복에 지친 또 어떤 이는 아픔과 행복, 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떠나기도 한다.

다들 저마다의 슬픔을 쌓으며 살아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잊으려 할수록 생생하게 살아 돌아올 뿐이다. 그 감정을 그저 버티고 담담히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만 가능하다. 슬픔을 버텨가며,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진다. 죽음과 가까워지는 우리는, 오늘을 잊어야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일까.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살아온 인생이 전혀 다른 타인의 삶을 어찌 겨우 대화 몇 마디로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겠는가.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기에, 서로의 슬픔을 듣는 일은 더욱 조심스럽고, 쉽게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려는 것은 위선이자 죄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함께할 수는 있다. 함께 숨 쉬며 공명할 수 있다. 당신의 슬픔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함께 듣고, 함께 서 있겠다고, 그렇게 약속할 수 있다. 어쩌면 가식적인 그 약속도, 갈기갈기 찢긴 누군가의 마음에는 살아갈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나 혼자 이 커다란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니란 것을, 누군가 함께 짊어져 주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말해준다면, 우리 세상이 조금은 살아갈만한 세상이 되지는 않을까.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친절하기. 이것이 슬픔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영화의 대사로 글을 시작했으니, 글의 마지막도 영화 대사를 빌려본다.

“물론 이 외로운 삶은 쉽게 바뀌지 않겠죠. 불행도 함께 영원히 지속되겠죠. 뭐,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처럼 이렇게 여러분들이랑 즐거운 날도 있으니까 말이에요. 어쩌다 이렇게 한번 행복하면 됐죠, 그럼 된 거예요.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

- 영화 『꿈의 제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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