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한국의 언론 상황은 녹록지 않다. 매체가 다양해져 과거 주류 언론매체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유튜버 방송의 시청률이 공영방송의 시청률을 다반사로 넘어선다. 다만, 매체 자체의 영향력과 달리, 기사의 영향력만은 경우에 따라 여전하다. 어떤 특종은 상당한 사회적 파급력을 갖는다. 이에 특종에 사활을 거는 행태가 전에 없이 가열돼있다. 극심한 생존 경쟁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문제가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가짜뉴스 양산이다. 소위 ‘아니면 말고’ 식 기사들이 출몰하면서 언론의 신뢰성을 좀먹은 지 오래다. 무책임한 기사는 선정주의를 통해 영리를 탐하는 황색저널리즘의 병폐였다. 작금에는 언론 일반의 것이 됐다는 우려가 있다. 이는 정론의 기본을 배반하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언론의 초심을 톺아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일신우일신,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항시 비판을 감행하는 언론의 기본 윤리일 것이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 기자들의 받아쓰기 행태에 대해 자기비판하고, 취재에 의한 기사, 심층 기사 등으로 방향 전환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보도자료를 답습하는 기사, 통신사의 선행 자료를 배포하는 기사 등은 기자의 기사가 아니다. 심층 기사는 차치하고, 최소한의 사실 확인이 있고난 뒤에 작성한 문장들만이 기사로 불릴 자격이 있다. 검보다 강하다는 펜의 힘은 그런 기본에서 나오고, 그런 펜만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반대의 경우는 사회에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더해 언론은 ‘공정’을 생명처럼 생각해야 한다. 언론마다 주된 논조가 있고 기자마다 주관이 있을 수 있지만, 언론은 공기(公器)다. 사측의 논조와 기자의 주관이 공의(公義)를 훼손하는 정도에 이를 때는 멈춰야 한다. 언론의 공정은 기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 공정은 오히려 솔로몬의 지혜 같은 것이다. 지혜는 정보나 지식과 달리 애정을 갖고 있어서, 성경에서는 지혜를 ‘다정한 영혼’이라 정의한다.


촛불혁명 이후에도 한국 사회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이럴 때일수록 언론이 형성하는 여론의 역할은 막중하다. 언론이 다정한 영혼을 가지고 공정하게 근거 있는 기사들을 제공할 때 ㅡ 이것이 정론의 기본이 아닐까 ㅡ 여론은 사회의 갈등을 풀어가는 방향으로 나설 것이다. 어느 사회나 이해관계의 갈등은 있고 정치는 갈등을 풀어가는 예술이다. 언론 역시 정치 행위로서 갈등을 풀어가는 쪽으로 임해야 한다. 갈등이 최소화한 상태야말로 언론이 지향하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흔히 언론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이유도 그런 지향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시금 우리 언론의 깊은 자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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