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운 보도부장 (철학·17)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작가의 말 중에 한 문장이다. 올해 읽었던 글들 가운데, 단연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이다. 이어 작가는 ‘아주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심연을 건너 상대방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연을 건넌다’는 명제에 깊게 파고들었다. 그동안 나는 살아오면서 관계에 많은 힘을 쏟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짐과 동시에 사회로부터 철저한 단절을 겪어본 경험이 결정적이다. 그 이후, 사람과 사람 간 관계는 영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관계에 몰두하기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내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는 ‘좁고 깊은’ 영역으로 한정됐다.

그렇다고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마음을 터 넣고 지내는 사람이 매우 적었을 뿐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내 인간관계는 마치 넓은 정원 가운데에 좁고 속이 깊은 우물이 있는 모양새와 같다.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다. 간혹 내 속을 상하게 하는 말도, 선을 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심한 말을 한 것은 횡적인 ‘사실’이지만 내가 그동안 그 사람을 봐온 것은 종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렇다면 상대방도 나를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난 20대를 보냈다.

최근 내 생각과 다르다는 걸 느낀다. 내 감정에 솔직해지지 않고,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털어놓지 않으면서 단순히 ‘싫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싫어하지 않는 것’ 말고 그 이상의 것을 상대방에게 내줘야 하고, 상대방도 나의 많은 부분을 알고 싶어 한다. 지금까지는 애써 그 사실을 무시해왔다. 내 마음속 정원 한가운데 있는 우물 주위에는 매우 높은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벽에 부딪힌 내 주변 사람들은 실망했다. 그들이 느낀 감정은 반감이나 적대감이라기보다 서운함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들은 내게 “서운하다”고 말했다.

우물 주위에 높은 벽을 세운 이유는 내 솔직한 감정을 내보이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게 누군가에겐 고통이고, 부담으로 작용했던 어렸을 때 경험은 우물 주변에 벽돌을 차곡차곡 쌓게 했고 짧지 않았던 그 시간은 필요 이상으로 높은 벽을 쌓게 했다. 그 벽에 부딪혀 돌아가는 사람에게 본심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우물 속에 갇혀 있는 내 외침이 벽 뒤에 있는 그들에게 가닿기란 만무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운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우물 속을 나와 벽을 허물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요즘이다. 내 안의 벽을 깨는 것은 김연수 작가가 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넘어 가닿을 수 있는 조건 중 하나임을 깨닫는다. 우물 밖으로 나온 뒤에는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내 감정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려고 한다. 작가는 얘기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내 일이었다” 진정성과 감정을 함께 갖춘 온전한 나로서 상대방을 대하고 그를 생각하는 것. 그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방법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이 글은 지난 20대 동안 살아온 내 인간관계를 반성하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건네는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손길이기도 하다. 부디 그 사람과 내 사이에 있는 심연을 건너 가닿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