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이라면 한 번쯤 네모난 텔레비전 속 만화영화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난 10월, 그때 그 시절 캐릭터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일을 벌였다. 기존 여성 캐릭터들을 2019년 버전으로 새롭게 디자인한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주최자인 대학생 전채연(23)씨 외 다수 온라인 참여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추억의 애니메이션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성적 대상화된 모습을 제거하고자 기획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여성 캐릭터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꾸미지 않는다는 ‘탈코르셋’의 사전적 정의를 빌려 여성 캐릭터에 내재한 억압을 탈피한 프로젝트다.

 

Q.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여성 캐릭터들’ 프로젝트의 합작 계기가 무엇인가.
A. 나는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해 ‘투니버스’ 프로그램을 많이 보고 자랐다. 추억을 회상하는 콘텐츠를 디자인해보고 싶던 어느 날, 추억의 여성 캐릭터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글을 우연히 보게 돼 구상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만화영화를 볼 땐 몰랐지만, 최근에 다시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미성년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노출이 심하고, 성적인 자세가 부각된 디자인이 많았다. 안타까웠다. 내가 캐릭터에 애정을 가졌던 만큼, 이런 디자인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게 여성 캐릭터 탈코르셋이었다. 참여 여부를 온라인에 문의했고, 많은 호응이 있었다. 나 혼자 진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의도한 것도 이유가 있다. 탈코르셋은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을 보고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참여자들이 재구성한 캐릭터를 보면서 이전의 캐릭터들이 얼마나 성적으로 대상화됐는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Q. 프로젝트 참여자 2차 모집 때는 더 구체적인 내용이 추가됐는데 설명 부탁한다.
A. 여러 결과물을 받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추가로 2차 모집을 받았다. 이번에는 노출이 심한 옷뿐 아니라 자세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여성 캐릭터들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들의 자세는 모두 성적인 면모를 부각하거나 소극적으로 표현됐다. 예를 들면 고양이의 특징을 살려 변신한 소녀 캐릭터는 꼬리가 항상 말려있고, 손발을 오그라뜨린 자세로 요염한 느낌을 준다. 어린아이들이 보는 캐릭터인데 손끝, 발끝마저 ‘예쁘게’ 표현한 디자인은 무의식중에 ‘여자는 자세도 예뻐야 한다’는 것을 시청자에게 주입할 수 있다고 느꼈다. 또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캐릭터마저도 여성 캐릭터에게는 ‘귀여움’과 ‘예쁜 장식’이 가미돼있었다. 그래서 무기 디자인도 바꿔보자는 내용을 공지에 추가했다. 생각해보면 무기가 예뻐야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캐릭터의 체형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전투하는 여성은 근육이 붙고 허리도 두꺼워지는 게 당연한데 말이다.

 

Q. 예전과 다른 관점으로 여성 캐릭터를 바라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다양한 페미니즘 서적과 글을 읽었다. 이를 통해 내가 좋아했던 리본이나 디즈니 공주 등 ‘여성적’이라고 분류됐던 면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당장 올해 초까지만 해도 선뜻 탈코르셋 이슈에 동참하지 못했다. 내가 예쁜 게 좋고, 꾸미고 싶은 건데 노출이 있는 옷을 즐기는 게 뭐가 문제인지 싶었다.
그런데 지난해 학원에서 일하면서 현실이 보였다. 여중생들은 화장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초등학생들은 어린 나이부터 성적 고정관념에 갇혀있었다. 아빠를 그리자고 하면 짧은 머리에 넥타이를, 그리고 엄마를 그릴 땐 속눈썹에 치마를 그렸다. 아이들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미지의 출처가 궁금했다. 답은 우리가 쉽게 접하는 미디어에서 찾았다. 나도 어릴 때 “공주님 그리세요” 하면 꼬박꼬박 치마를 입혔다. 내가 자주 보던 미디어에서 여성은 늘 치마 혹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콘텐츠와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는 걸 깨달았다.
요즘은 아이돌 산업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여성 아이돌이 교복을 입고, 때로는 연령대를 더 낮춘 옷으로 유아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아이돌의 문화였는데 우리나라까지 확신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미디어와 사회를 통해 특정 성별의 모습이 고착됐다. 내가 시스루 옷을 좋아했던 것 역시, 시스루가 미디어로 인해 사회에서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화장하는 것 역시 나의 욕구에 의해서라기보다 사회적 분위기나 압박으로 인한 것 같았다.
나는 이 학생들한테 일주일에 몇 시간 보는 학원 선생님이지만, 치마를 입지 않고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머리도 짧게 잘랐다. 학원에 갈 때는 최대한 바지를 입고 화장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이런 변화를 맞게 되면서 TV에서 보는 콘텐츠들도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Q. 이렇게 재구성된 캐릭터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A.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 있는 사람만 이 작품에 주목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생각보다 유명해졌다. 소위 ‘악플’이 많이 달렸다. 그냥 남자로 그린 거 아니냐는 비판부터, 여러 가지 욕설까지 시끄러웠다. 이런 반응을 보고 아직 탈코르셋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비난보다도 응원의 글이 더 많았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등 여러 사건으로 인해 점점 페미니즘 이슈에 동조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내가 좋아서, 내가 세상을 좀 바꿔보고 싶어서 시작한 취미 생활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게 뿌듯했다. 그래서 이제 악플을 봐도 아무런 기분이 안 든다. 오히려 악플 덕분에 작품이 더 알려지기도 한다.

 

Q.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성적 대상화를 탈피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이 제거된 캐릭터를 많이 소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근육형 여성 캐릭터 등 더 개성적인 유형의 캐릭터가 많이 나와야 한다. 내가 대단한 사회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장 나부터, 내 주변부터 조금씩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평소에 내가 쓰는 단어에 가부장적인 요소가 있다면 바꿔보는 건 어떨까. 오늘 하루는 화장을 안 해보는 건 어떨까. 그런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글 김인영 기자
hellodlsdu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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