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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주도] 코끝의 달콤함을 담은 풍류의 술, 중국의 고량주
  • 민수빈 박민진 기자
  • 승인 2019.11.03 23:10
  • 호수 53
  • 댓글 0

우리에게 무심코 털어 넣는 술 한 잔은 익숙하지만, 과연 그 술의 탄생과 비화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있을까.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보거나 마셔봤을 ‘그 술’에 얽힌 이야기에 푹 빠져보자. 아는 만큼 마시게 될 것이다.

세계주도의 세 번째 이야기, 이번 무대는 아시아다. 주인공은 중국의 고량주. 고량주는 증류를 거치는 투명한 술로, 그 색깔 때문에 중국어로 ‘바이쥬(白酒)’라고 불린다. 지난 2003년 ‘연태구냥’이란 이름의 고량주가 수입되며 우리나라에서도 대중화됐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른 수입 주류와 달리 이 술은 한국어가 적힌 병에 담겨온다. 이 술이 중국과 한국을 동시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매력은 뭐였을까.

도자기와 함께 빚어지는 맑은 향과 강렬함


고량주의 유래를 두고는 다소 이견이 있다. 우선 청동기 주나라 시대부터 청동 증류기에 고량주를 빚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식량으로 쓸 곡식조차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상류층에 한정된 기록인 듯하다. 고량주에 대한 공식적이고 대중적인 기록은 명나라 시대부터 시작된다.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피난민이 여독을 풀기 위해 고량주를 빚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중국에서는 명절이나 절기에 맞춰 술을 곁들이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됐다. 귀족들은 탁한 적황색을 띠는, 막걸리와 유사한 황주를 주로 즐겼고, 평민들은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 고량주를 선호했다고.
증류주는 오랜 시간 증류를 거친 뒤 보관하는 과정에서 특유의 알코올 향이 더해진다. 우리나라의 소주, 영국의 위스키 등에서 강한 알코올 향이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고량주는 다르다. 수수를 빚어 찐 누룩을 증류한 뒤 도자기에 보관되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나무통과 달리 알코올의 착향과 변질을 막아준다. 그리고 고량주 특유의 맑고 원숙한 향을 만들어낸다. 같은 누룩으로 만들었지만, 공업용 스테인리스 용기에 담기는 소주나 나무통에 보관되는 위스키에서는 맡을 수 없는 꽃 향이나 과일 향이 난다.
하지만 달콤한 향에 속아 고량주를 순한 술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량주 중에 가장 순하다는 연태구냥도 무려 34도에 달하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는 취하는 것이 모두에 대한 예의’라 말한다는 중국인들의 배포가 느껴진다. 하지만 고량주는 오랜 증류 덕분에 불순물이 적어 숙취가 거의 없고, 맛도 깔끔하다.

한낱 꿈처럼 즐거운 풍류의 순간 한 모금

달콤한 향취와 시원한 목 넘김으로 중국 내에서도 ‘반주(飯酒)계의 팔방미인’이라 불리는 고량주. 기자는 높은 도수에도 깔끔하고 뒤끝 없다는 술의 느낌이 궁금했다. 중국 음식과의 궁합에 대한 호기심까지 안고, 중국 요리인 마라탕과 훠궈 전문점인 신촌의 ‘라장훠궈’를 찾았다.
고량주는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고 기름진 중국 요리와 유독 합이 좋다고 한다. 마침 바람이 적잖이 불고 쌀쌀해 뜨끈한 마라탕을 파트너로 정했다. 곧 주문한 연태구냥이 나왔다. 용량은 소주의 1/3 용량이지만 가격은 소주의 2배가량이었다. 잔은 소주잔의 절반 크기였다.
투명한 술병을 기울여 술잔을 채운 뒤 조심스레 연태구냥을 입안에 머금었다. 처음엔 뜨거웠다. 34도의 술이 불을 품은 듯 그 열기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내 처음 맛보는 향기가 찾아왔다. 분명 뜨거운 알코올이 몸속을 훑는 느낌이 드는데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과일 빙수 같은 향이 났다. 술은 도수가 높아질수록 역하다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술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깔끔한 맛이 음식의 맛을 즐기는 걸 방해하지 않아 마라탕과의 궁합도 탁월했다.
비록 허한 속과 이후 일정 탓에 과음을 자제했지만, 더 마시지 못해 아쉬웠다. 이 매력적인 술은 바람이 솔솔 부는 동네 뒷산 정자에서 맛 좋은 음식과 좋은 사람을 데려다가 천천히, 끝까지 마시고 싶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옛시조에서 선비와 도사들이 읊곤 하던 ‘풍류’의 느낌일까.

조선 시대 쓰인 김만중의 고전 소설 『구운몽』의 주인공인 성진은 용궁에 심부름을 가게 된다. 그러다 계속되는 권유로 술 석 잔을 연거푸 마신 뒤 잠든다. 그의 꿈에서는 중국 천하를 다 가진 선비 양소유의 삶이 펼쳐진다. 하지만 곧 잠에서 깬 성진은 자신이 가진 건 백팔염주뿐인, 까까머리의 소화상*일 뿐임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기울이는 술 한 잔과 그 시간도 한낱 찰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낭만과 흥취에 실컷 젖어 드는 시간은 두고두고 꿈같은 순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맛 좋은 술과 휴식이 간절해지는 날, 고량주에 정성이 들어간 요리 한 접시를 곁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 『구운몽』 속 성진이 꿨던 한밤의 꿈처럼,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소화상: 갓 출가한 어린 승려

글 민수빈 기자
soobni@yonsei.ac.kr

사진 박민진 기자
katarina@yonsei.ac.kr

민수빈 박민진 기자  soobn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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