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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칼럼] 가을, 문학을 읽자
  • 임재호 교수(우리대학교 문과대학)
  • 승인 2019.11.03 22:35
  • 호수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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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호 교수
(우리대학교 문과대학)

가을이 천고마비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은 다 흘러간 옛말이다. 2019년 가을은 미세먼지가 점령하고 돼지열병이 걱정되는, 책을 읽지 않는 시대다. 한 마디로 격세지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학을 읽고 쓰지 않을 수 없다. 시는 꿈이요 소설은 허구이니 비현실적이라고 단죄할 수는 없다. 현실이 각박할수록 문학은 빛을 발하는 법이기도 하다. 한 줄의 산문이 갇힌 자에게 희망을 주고, 한 줄기 시가 인생을 살리기도 한다. 어느 작가의 무덤 앞에 놓인 메모지에는 “당신 덕분에 내가 살았습니다.”라는 독자의 고백이 적혀 있기도 했다.

최근 우리대학교에 손님이 한 분 오셨다. 이스마일 카다레가 그분이다. 팔순 넘은 알바니아 출신 문학가는, 망명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문학의 일부를 쓰고 있는 거장이다. 처음에는 시를 썼고 나중에 소설을 쓴 이 문인의 작품은 잘 읽힌다. 언어에 연결된 사고가 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깊이 모를 질문들을 던진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관습이 우리에게 실제로는 무엇인가와 같은 본질적 물음을 선사한다. 한 번 읽으면 손에서 놓기도 어렵지만, 놀람을 주는 대목들 때문에 계속 읽기도 어려운, 모순적 독서 경험을 카다레의 세계도 전해준다.

만산홍엽. 그리고 만산낙엽. 가을은 우리에게 모순적 경험을 앓게 하는 문학 텍스트 같다. 이 순간이 지나면 세상은 백색 캔버스로 바뀌고, 봄의 전령들이 한 점 한 점 색을 떨어뜨릴 것이다. 모두 창조주가 그렸을 태고의 풍경만 같고, 문학은 그런 풍경을 읽어내거나 창작할 수 있는 마음의 힘도 길러준다. 문학에 침잠했다가 돌아오는 독자와 작자의 마음에는, 세계의 풍경이 들어있게 돼서, 그 풍경을 확대해 세상을 읽고 쓰게도 되지만, 문학의 장점은 동시에 자유를 준다는 데도 있다.

문학을 너무 좁은 개념으로만 볼 일도 아니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문학은 18세기의 산물인바 시대를 넘어서면 문학 개념은 광활하다. 철학서도 문학이고 우주론도 문학이다. 일언(一言)으로, 모든 책은 문학일 수 있다. 무엇을 읽느냐도 중요하지만 읽고 있느냐도 중요하다. 무엇을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쓰고 있느냐도 중요하다.

문학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어서 소중하다는 말도 있다. 수평선도 지평선도 쓸모없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문학이 왜 쓸모없겠는가. 문학의 효용은 여기서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날 이후 남은 것들(The remains of the day)』의 집사 스티븐스는 말을 잘 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말한다.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실존적 토로나 “오 로미오 당신은 어째서 로미오인가요!” 라는 줄리엣의 애절한 비명은 한 가지(支) 문장이 어떻게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지 시간을 거스르며 보여준다.

한 사람은 하나의 한계 상황이다. 타인의 문학을 걸어 간접 경험하는 세계는 한계 상황을 벗어나게 해 한 사람을 많은 사람이게 해준다. 문학이라는 길은, 타인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방적 태도를 후천적으로 갖게 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말했던가. 나에게 당신이 읽은 책을 알려주면 나는 당신에 대해 알려주겠노라고. 윤동주 시인이 사랑한 프란시스 잠의 시의 일부를 같이 읽어보자.

구월 - 폴 클로델에게

구월은, 바람이 부는지 보기 위해
사각모를 쓴 학자들이 설명하기를,
균형의 법칙을 따른답니다.
구월에는
바다 위에서 배들이 춤을 추고
넘어지지 않고. 책들은 추분(秋分)에 대해 말한답니다.
나는 이런 책도 읽었는데요
일식들과 별자리들과 썰물들과
모순들이
구월의 세상을 설명해준다는 책이었어요.

임재호 교수(우리대학교 문과대학)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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