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기록하는 작가 뷰엔 칼루바얀

▶▶ 그동안 작가가 수집한 자료가 전시회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국-필리핀 수교 협정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했다. 수교 7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는 다양한 필리핀 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필리핀 작가의 전시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라이즈호텔에서 개최된 전시회 ‘어느 청소부의 안내 - 풍경, 뮤지엄, 가정’을 찾았다.

 

지평선 하나에
소실점 여러 개

 

“개인에게 한 사회 시스템이 영향을 주면 그건 다시 개인이 바라보는 풍경에도 영향을 미친다”

작가 뷰엔 칼루바얀(Buen Calubayan)은 자신을 청소부라고 칭한다. 칼루바얀은 필리핀 국립 중앙 박물관의 학예사로 근무하며 매일 같은 일과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청소부를 유심히 지켜봤다. 청소부의 꾸준함에 영감을 받은 칼루바얀은 그것을 자신의 자료수집방식에 접목했다. 그는 꾸준히 일상 속의 사소한 생각부터 필리핀의 미술과 역사에 관한 자료까지 수집했다. 이번 전시회는 그 결과물로 구성됐다. 작가는 자신이 축적한 다양한 기록물과 회화를 통해 풍경, 뮤지엄, 가정을 보여준다. 이는 곧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관계를 비유한 단어들로 각각 자연, 사회구조, 개인의 시각을 뜻한다. 작가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세상의 이치를 만들어나간다고 말한다. 그는 일상에서 우리의 지각을 지배하는 장치들이 어떻게 개인이 세계를 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지 이야기하고자 했다.

작가는 필리핀 풍경화가 선 원근법을 활용하는 르네상스 기법에 기술적인 바탕을 두고 있음을 주목한다. 선 원근법 방식은 공간의 입체적 원근을 표현하기 위해 소실점을 사용한다. 소실점은 선과 선이 만나는 점으로 1410년경 르네상스 시대부터 활용됐다. 칼루바얀은 “우리는 하나의 소실점과 지평선을 그리도록 교육받는다”며 “오직 한 가지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독특한 점은 작가의 물음이 기존의 관점과 학습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는 원래의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시선을 더하고자 했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 걸린 그의 풍경화를 자세히 보면 소실점 위에 또 다른 소실점이 더해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칼루바얀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지각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학습된 보편적 지각방식으로 인해 그 능력이 점차 매몰되고 있다. 작가는 보편적 지각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의 판단을 제한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해먹으로 엮어진 필리핀 혁명

▶▶ 필리핀 혁명사를 다룬 책으로 엮어진 해먹의 모습

‘혁명의 나라’라고 불리는 필리핀의 이면에는 두 차례의 식민지배 역사가 존재한다. 1896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가 이끄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 ‘카티푸난’이 지배국이었던 스페인에 항전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1898년 미국이 필리핀의 주권을 획득하며 동남아시아 최초의 독립혁명은 막을 내리게 된다.

작가는 필리핀 혁명의 일대기를 하나의 ‘해먹’으로 표현했다. 평범해 보이는 해먹을 자세히 보면 그 재료가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먹의 재료로 사용된 레이날도 클레메나 이레토(Reynaldo Clemena Ireto)의 『Payson&Revolution』은 필리핀 사회 격동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책의 낱장이 하나하나 엮여 만들어진 해먹을 ‘필리핀의 현 사회와 과거의 역사를 연결하는 공간’이라고 일컫는다. 관객은 해먹을 통해 필리핀 혁명의 역사를 다시금 마주할 수 있다.

해먹의 모습은 예전 혁명군이 숨어있던 피난처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오늘날 필리핀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 중 한 곳인 바나하오산은 한때 혁명가들이 투쟁한 피난처였다.  이들의 투쟁이 혁명의 역사로 기록되면서 바나하오산은 종교적으로 신성한 장소가 됐다.

작가가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기록’에 있다. 집요하게 삶을 기록했기에 그 속에 숨어있는 사회적 관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칼루바얀은 “기록은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어떤 형태의 기록이든 그것은 모두 ‘기록’ 그 자체로 통용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 감정도 기록의 산물이다. 작가는 “대상이 ‘슬픔’이라는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과거 우리가 몸에 ‘슬픔’을 기록했기에 대상에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꾸준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맞닥뜨린 사회적 질문들에 새로운 답을 내릴 수 있다.  작가는 세상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글·사진 박민진 기자
katarina@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