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 보도부장 (정경경제/문화인류·17)

오랜 시간 동안 나의 꿈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회적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고, 그 후에는 세상을 좋게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 사용한 단어 하나가 타인에게 상처가 되며 잘못된 사회체제 양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그래서 최근,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을 다시 설정했다. 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닌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살면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기란 불가하다. 나의 모든 말은 내뱉어지는 순간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또 단어 하나의 사용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면 ‘틀린’ 단어를 사용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목표는 내가 타인 혹은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긍정적 영향은 끼치지 못할망정, 부정적 영향은 끼치지 말자는 거다.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다.


#유모차는 잘못된 단어다
얼마 전 서평 과제를 위해 가족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는 책을 읽다가 ‘유아차’라는 단어가 눈에 걸렸다. ‘왜 유모차 대신 유아차라고 표현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바로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모차’의 ‘모’는 어미 모(母)이며, 유모차라는 단어는 곧 ‘아이를 태워서 밀고 다니는 수레를 사용하는 사람은 엄마’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 단어는 그릇된 성 역할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단어였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결심은 어려웠지만, 무심코 사용한 단어 하나로 그 결심을 무효화 하는 건 너무 쉬워 보였다.


#개인은 각자의 삶의 주체다
류석춘 교수의 발언으로 학내외가 시끄럽다. ‘위안부는 매춘’이라는 발언과 ‘궁금하면 한번 해볼래요?’라는 발언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충격을 줬다. 기성 언론들은 ‘매춘 망언’에 초점을 맞춰 사건을 보도했다. 그가 ‘불건전한 사상’을 갖고 위안부를 모독한 것과 더불어 배움의 장이 돼야 하는 강의실에서 잘못된 역사관을 가르쳤다는 것이 그를 향한 주요 비난이었다. 반면 이에 비해 기성 언론에서 그의 성희롱 발언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는 입장문과 인터뷰를 통해 논란이 된 성희롱 발언은 맥락이 배제된 채로 전달됐다며, ‘한 번 해볼래요?’의 목적어는 ‘매춘’이 아닌 ‘조사’였다고 사과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이 성희롱이었는지의 여부는 그가 아닌 발언을 들은 학생들이 결정할 문제다. 그의 발언에서 학생들은 객체였고 성희롱의 대상이었다.


류 교수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사회에는 타인에 대한 대상화가 범람한다. 우리는 이미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대상화해 인격체가 아닌 객체로, 자신의 주관적 평가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친구들과 쉽게 주고받는 ‘저 사람 잘생겼다’라는 등의 발언도 대상화 표현이다. 우리는 류 교수의 발언에는 분노하면서도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대상화를 자행하는지는 깨닫지 못한다. 심지어 류 교수 사태를 보도하는 기사에도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댓글이 다수 존재했다. 물론 교수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과 인터넷 기사에 댓글을 다는 개인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 의한 것이라도 대상화가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말 한마디에도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다. 우리는 모두 갖가지 대상화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예민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 때문에 무심코 사용했던 언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줬을지 생각하고 또 반성한다.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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