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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모범수 가석방에 대한 학우들의 의견사회를 병들게 한 범죄자가 '모범'수란다
  • 배은지(인예국문·19)
  • 승인 2019.09.30 00:41
  • 호수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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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지
(인예국문·19)

‘모범수’란 교도소 안에서 규칙을 잘 지켜 다른 죄수의 모범이 되는 죄수를 뜻한다. 웃기는 일이다. 벌을 받기에 마땅한 범죄를 지은 사람들의 집단 안에서 급이 매겨지며 1급 모범수가 될 시에는 가석방이라는 제도가 내려진단다. 최근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른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는 지난 1980년 13세부터 70대까지의 여성을 상대로 열 차례의 강간, 살인 범죄를 일으켰으나 끝끝내 범인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던 대한민국 최악의 미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사건은 무려 33년만인 최근, 위 사건과 별개의 강간 살인사건으로 수감됐던 수감자와 화성 연쇄살인사건 피해자들에게서 검출된 DNA가 일치된 것을 화두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용의자의 이름은 이춘재, 1995년부터 20년이 넘는 수감생활 동안 단 한 차례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이춘재는 무기징역이라는 형벌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가석방됐을 1급 모범수였다고 한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범죄자에게 모범이란 타이틀은 사치 아닐까 하는 점이다. 범죄란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반사회적 행위로 이를 처벌하기 위한 규정 사항도 법에 명시돼있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가 존재함에도 반사회적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등급을 매기며 상과 벌을 부여하는 현 사태가 말이 안 된다 생각한다. 두 번째, 우리나라 교도소는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다. 온 국민을 떠들썩하게 만들 만큼 파장력을 행사한 범죄였음에도 그에 반한 10년 혹은 5년 남짓의 징역 선고로 많은 이들의 반발을 산 경우를 여러 번 봤을 것이다.


그간 이 사회를 살아오며 우리는 본인 일이 아님에도 함께 고통받고 함께 분노한 반인류적 범죄를 피부로 느껴왔다. 청원이나 집회 등의 대국민 운동도 여럿 일어났지만, 결과는 항상 미미했고, 그 이유는 교도소의 존재 의의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교도소란 범법행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수용해 재사회화를 이룰 수 있도록 교정 처우를 도울 수 있는 곳이다. 이를 근거로 1부터 4까지의 등급을 매겨 1급 모범수가 된 범죄자들에겐 가석방이 이뤄질 수 있었다. 재사회화가 됐다는 뜻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기 아래 모든 국민은 평등하며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라지만, 과연 범죄자를 우리 사회의 틀 안에 넣어야 될 이유가 존재할지는 의문이다. 그 논리라면 ‘반사회적’이라는 말과 ‘반인류적’이라는 개념은 왜 생겨났겠는가. 사회에 준하고 인류에 준한 범법자를 벌하는 것은 당연하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진정한 방법이다. 위 언급된 용의자 이춘재는 가장 최근 이뤄진 4차 조사에서도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지만 같은 해 화성군 태안읍 일대에서 벌어진 7건의 연쇄 성폭행 사건에서도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다. 수감 생활 중엔 재사회화가 완전히 이뤄져 1급을 받은 모범수 이춘재는 정말 ‘모범’이었을까. 안타깝게도 필자는 부정한다.


조선 후기부터 내려온 전통 소설 『호질』에 등장하는 북곽선생처럼, 밀회를 즐길 때와 무서운 범 앞에 섰을 때의 행동거지를 바꾸기란 숨 쉬는 것과 같이 쉽다. 북곽선생이 범 앞에서 보였던 그 비굴하고도 조그맣게 휘었던 허리는 해가 뜸과 동시에 다시 꼿꼿이 펴지니,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범수들의 허리는 진실한가. 또한 진실하지 못했다면, 바뀔 수 있는가. 글을 준비하며 모범수의 급과 가석방 제도, 교도소의 의의 등에 대해 다시 한번 공부하며 글의 중심이 됐던 이춘재의 사건 기사들을 수없이 읽었다. 분노와 이성 사이를 오가며 본래의 ‘1급 모범수 가석방 반대’에 대한 나의 주장과 신념은 더욱이 확고해졌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 사회의 진정한 정의와 안녕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와 함께 사건 사고에 관련한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느꼈다. 글을 쓰며 필자는 우리 사회가 병들었음을 확실히 느꼈다. 그러나 회생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있으며 이 사회를 바꿀 힘은 나와 이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다. 필자의 글에 잔뜩 실린 불편함에도 사회를 바꿀만한 힘은 얼마든지 실려 있다는 말이었다.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회에게 느낀 부조리함에 대한 비판을 마지막으로, 이 글이 누군가에겐 비판이 아닌 용기로 다가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글을 마무리한다.

배은지(인예국문·19)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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