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윤 사진영상부장 (정경경제·18)

혐오로 얼룩진 세상이다. 사람들은 날마다 혐오표현을 사용한다. 가끔은 눈이 찡그려질 정도로 듣기 힘들다. 물론 사람마다 혐오의 범주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한다. 나도 처음부터 혐오표현을 잘 알진 못했다. 그만큼 혐오라고 인식하는 것의 범위도 작았다. 흔히 ‘빻은’소리라고 이야기하는 말들도 많이 하곤 했다. 하지만 한 사건이 계기가 돼 혐오 표현에 대한 나의 인식은 변화했다.

#장애인
지난 2018년 우리신문사에서 부기자로 활동하던 시절, 장애인이동권의 어려운 현실을 조명하고자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혐오표현에 대해 알게 됐다. 장애인의 목소리를 영상에 담기 위해 장애인이동권 시위 현장으로 나섰다. 그 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이동권 보장을 외치고 있었다. 취재 도중 “너네 때문에 시민들이 피해를 보잖아!”라는 한 지하철 이용객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 나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그의 태도에 문제를 느꼈다. 하지만 노골적 태도에만 주목했을 뿐 혐오표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장애인으로 인해 시민이 피해를 본다는 것. 즉, 시민과 장애인을 나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그건 혐오예요』의 저자 홍재희 작가는 이에 대해 “결국 장애인을 자신과 같은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장애인도 시민이다.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라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지하철 이용객의 말에서 혐오표현을 느끼지 못했다면 잠시 숙고의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노숙인
지난 2018년 여름학기에 있었던 일이다. 강의 도중 “요즘 노숙자들을 보면 우린 집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껴야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을 열등하다 규정하고 비교하며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노숙인 혐오를 표출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이 생각이 혐오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 주장하는 태도는 분명 잘못됐다. 우린 쉽게 비교 대상을 찾곤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간다. 비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비교란 둘 이상의 사물에 대한 유사, 차이, 일반법칙을 고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비교에 가려진 혐오를 피해야 한다. 대상 간의 우월과 열등은 결국 혐오를 양산한다. 세상은 혐오 없는 비교가 필요하다.

#성소수자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나는 시각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사람마다 환경적, 종교적 이유 등으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성소수자 혐오는 시각의 다양성과는 다른 문제다. 어떤 이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여부를 논한다. “성소수자를 반대하지 않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얼핏 들으면 성소수자를 반대하지 않는 태도로 보인다. 반대하지 않는 입장이라고 혐오가 없는 것일까. 나는 성정체성을 개인의 이해여부로 결부시키는 것 자체가 혐오라고 생각한다. 성정체성은 우리가 이해할 대상이 아니다. 이미 실존하는 성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생산적인 논의로 발전하기 어렵다. 마치 이성애자를 이해여부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이해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나의 경험들로 혐오에 대해 설명했다. 정리해보면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현만이 혐오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자했다. 지금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혐오표현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혐오라고 인식하는 것의 범위가 늘어난다면 혐오표현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이는 머리로는 알겠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거창한 사자성어도 있다. 하지만 말하는 짧은 순간마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그냥 생각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고 있자. 여기서 선후관계를 잘 따져야 한다. 말하고 생각하는 건 성찰의 과정이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난 오늘도 말을 건넨다.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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