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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나는 기록한다 그러므로 실존한다
  • 박건 편집국장
  • 승인 2019.09.02 03:00
  • 호수 1835
  • 댓글 1
박건 편집국장
(행정/문화인류·14)

수습기자 시절 이창재 감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연출한 영화감독이다. 그 영화에 크게 감명했던 나는 인터뷰를 준비하며 이 감독의 다른 작품을 찾아봤다. 그가 『노무현입니다』 이전에 연출했던 영화는 세 편이었다. 그중 내가 주목한 작품은 그가 1년 동안 ‘호스피스’ 병동의 일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이었다.

평균 21일.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갖는 시간이다. 이곳에 도착한 환자에게 의사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많이 편안하게 해드릴까요. 아예 주무시는 것처럼 해드릴까요. 좀 아프지만 깨어있는 시간이 많게 해드릴까요.” 진통제를 얼마나 투약 받을지 환자가 선택하게 하는 질문이다. 언뜻 봤을 때 이 질문은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질문을 듣는 환자의 입장에서 가장 절실할 선택지는 바로 ‘죽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환자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그에게 죽음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고 선택 자체를 거부할 순 없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환자는 진통제 없이 더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세상을 등졌을 테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 선택해야 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처럼 더 이상 선택을 유보할 수 없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인터뷰 중 이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실존’하는 사람은 삶에 자신의 가치를 투영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간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생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대통령이기 전에 인간이었던 노무현의 삶을 조명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덧붙였다. 이 감독은 노무현이 우리 사회에 ‘정의’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고, 그 노력이 그를 실존적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이 감독과의 인터뷰를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내 삶을 반추했다. 살면서 내가 내려온 수많은 선택들은 가치의 실현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나는 실존에 대한 고민조차 충분히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생존만을 위해 살아오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과 실존 사이에서 시작된 내 고민은 다음 단계로 이행했다.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나는 특정 종교를 신앙하지 않지만 ‘자비(慈悲)’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이 단어를 한 글자씩 떼어놓으면 오묘하다. 강력하면서도 극단적인 감정인 ‘사랑(慈)’과 ‘슬픔(悲)’이 한데 모여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을 병렬하면 ‘사랑과 슬픔’이지만 합치면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이라는 의미가 완성된다. 내게 자비란 타인의 슬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로 살아간다는 건 내 안의 자비를 일깨우고, 실현하는 일이었다. 자본가의 ‘재개발 셈법’에 터전을 잃고 쫓겨나는 을지로의 상인들, 국가 위상을 떨어뜨린다는 판단 하에 소록도에 격리된 채 강제 노역에 시달린 한센인들,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까지. 그들을 응시하는 건 자못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글과 사진에 담아낼 때 비로소 나는 실존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건 내게 자비를 실현하는 일이자 실존을 확인하는 일이다. 만약 내가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가 돼 위 질문과 맞닥뜨린다면 나는 기꺼이 실존을 선택하겠다. 그리고 남은 생의 시간 동안 실존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테다. 아마 그 일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함으로써 자비를 실현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지 않을까. “의사 선생님, 혹시 괜찮다면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시겠어요? 종이와 펜도 가져다주세요. 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박건 편집국장  petit_gunny@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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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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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 2019-09-04 19:29:48

    오그리토그리하면서도 박건 기자님의 깊은 마음이 느껴지네요 언제나 응원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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