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수많은 이들이 오고 가며 열정과 젊음의 향이 짙어지는 곳, 신촌. 오래전부터 신촌은 청춘들의 열정과 사랑으로 팬덤의 역사를 선도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던 순수한 마음들과 함께했던 그때로, 『The Y』와 함께 되돌아가 보자.

 

-음악과 스포츠로 수놓아진 열정의 역사

신촌에 처음으로 팬덤이 등장한 건 1986년이다. 신촌의 라이브클럽 ‘레드 제플린’에서 결성돼 ‘한국 블루스의 상징’으로 불리는 그룹 ‘신촌블루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두웠던 시절, 신촌블루스는 시대에 발맞춰 회의로 가득 찬 청춘을 노래했고, 신촌의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아직 팬덤이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건 아니었다.

1992년, 음지 문화로만 취급받던 팬덤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이들이 등장했다.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의 새 막을 연 이들과 신촌도 발맞춰 움직였다. 신촌의 음반 가게 ‘향음악사’ 앞은 그들의 음반 발매일만 되면 줄을 서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그러던 1996년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은퇴를 발표했다. 이때 충격을 받은 팬들이 당시 서태지가 살던 연희동 자택에 몰려가 눈물로 집 앞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남아있다.

신촌의 팬덤은 비단 음악에만 머물지 않았다. 1990년대 많은 여학생은 해외가수의 내한공연을 기다리듯 설레는 마음으로 겨울을 기다렸다. 바로 농구대잔치가 열렸기 때문이다. 당시 연세대 농구부에는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서장훈 등 현재 한국 농구의 전설로 남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출중한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이들은 일명 ‘오빠 부대’를 이끌고 다니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1994년 연세대 농구부는 대학농구팀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뤄냈고, 그들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여학생들은 『응답하라 1994』의 ‘성나정’처럼 선수들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숙소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심지어 체육관에서 숙소로 향하는 선수단의 차량을 쫓아 달려가는 팬들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당시 연세대 농구부의 일원이었던 이상민 삼성 썬더스 감독은 “하루에 팬레터만 2~3천 통씩 받았다”면서 “경기가 끝나고 나면 선수단 버스로 이동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팬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글 민수빈 기자
soobni@yonsei.ac.kr

사진 정구윤 기자
guyoon1214@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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