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부 김연지 기자 (국제관계·18)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애써야지만 가능한지 잘 안다. 그냥이란 말속에는 얼마나 많은 너만 아는 이야기들이 있겠니”. 한 정치인이 “그냥 평범하게 회사 다니며 지내고 있어요”라는 조카의 말에 한 대답이다. 우리는 자주 ‘그냥’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다 말할 수 없을 때, 혹은 나의 이야기가 이해받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냥’은 그 안에 많은 이야기들을 숨기고 내뱉는 가장 덤덤한 언어다. 동시에 그 무게를 온전히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하는 슬픈 언어이기도 하다.

기자 생활을 하며 수많은 ‘그냥’을 내뱉었다. 왜 학보사 기자를 하냐는 질문에, 그 생활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또 앞으로의 기자 생활을 묻는 질문에 “그냥 하는 거죠”라고 답했다. 성의 없는 대답으로 보이지만 이 한마디 안에는 많은 밤을 새우게 만든 불안과 고민이 담겨있다. 3학기의 기자 임기가 끝난 지금 이제는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털어놓고자 한다.

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우리신문사에 입사했다. 동시에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동기들이 ‘새내기’로 유흥을 즐길 때 나는 신문사 업무로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다. 떠들썩한 학교 축제들을 뒤로하고 편집국에서 기사를 썼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새내기에게 허락된 ‘미숙함’과 ‘방황’들을 ‘기자’라는 이름 아래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기자 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 나는 전에 없이 미숙했고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모든 시험에 명확한 정답과 해설이 있었던 학창시절과는 달랐다. 매주 신문 제작마다 시험대에 선 느낌이었지만, 쏟아지는 질문과 문제에 무엇 하나 명확히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떤 기자가 되고 싶을까, 좋은 기사란 어떤 기사일까, 원고지에 무엇을 넣고 무엇을 빼야 할까, 신문에 실릴 수 없는 이야기는 누가 판단하는가. 수습기자 땐 명쾌히 답할 수 있던 질문이었다. 오히려 나는 정식 기자가 되자 그 답을 얼버무렸다. 가까이서 바라본 기사와 발행은 기대만큼 단순하지도, 명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쓰고 싶은 기사와 쓸 수 있는 기사의 괴리, 쓸 수 있는 기사와 써야 하는 기사의 거리, 발행을 위한 기사와 기사를 위한 발행의 차이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러나 월요일마다 어김없이 발행되는 신문엔 기자의 혼란과 고민이 담기지 않아야 했다. 적어도 정돈된, 가능하다면 완벽한 기사를 써야 했다.  제작은 계속됐고 고민은 끊이지 않았다. 답을 찾지 못한 채 발행되는 나의 기사는 성취감보다 좌절감을 안겨줬다. 그럴 때마다 다시 ‘그냥’이라는 단어 안에 나의 갈등을 구겨 넣고 애써 외면했다.

이렇게, 막막하기만 했던 갈등과 고민들의 답을 나는 역설적으로 ‘그냥’에서 찾았다. 가까운 동료에게 물었다. 당신은 기자 생활을 어떻게 버티냐고, 몰아치는 갈등과 불안을 어떻게 견디냐고 물었다. “나도 불안해. 근데 시작했으니까 그냥 끝까지 책임지고 해야지” 동료의 ‘그냥’에는 책임감과 결연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비록 방황하고 고민할지라도 지금 가는 길이 맞다는 확신이 있었다. 문득 『연세춘추』 편집국을 돌아봤다. 새벽까지 불이 켜진 편집국에 바쁘게 움직이는 동료들, 이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그 수많은 ‘그냥’들. 우리가 던지는 ‘그냥’이라는 말에는 그 수많은 방황과 고민을 뛰어넘는 사명감 같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저앉는 대신 ‘그냥’이라고 내뱉는 것은 그래도 버텨내겠다는 의지이자 희망이다. 힘들고 고생스럽지만 그래도, ‘그냥’, 우리는 기자이기 때문이다.


아직 나만 아는 수많은 이야기가 남았다. 평범한 기자가 되기 위해 흘렸던 땀과 눈물들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안부를 묻는 질문에 나는 또 ‘그냥’ 잘 지낸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냥’ 뒤에 숨겨진 고민의 흔적과 의지의 무게를 아는 지금, “나는 그냥 잘 지내요. 당신은 그냥 잘 있나요?” 라고 묻고 싶다. 당신에게도.

 

글 김연지 기자
yonzigonz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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