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유공자 예우를 짚어보다

5·18민주화운동이 올해로 39주년을 맞았다. 지난 1980년에 광주시민이 흘린 피를 기억하는 추모 행진은 해마다 이어진다. 무고하게 짓밟힌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끔찍한 기억을 회고하는 작업은 다큐멘터리, 소설,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계속됐다. 그러나 39년이 지난 지금, 피해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보훈제도로 보장되는 5·18민주유공자의 삶과 이를 둘러싼 목소리를 쫓아봤다.

 

5·18민주유공자 앞에 놓인 현실
 

▶▶1980년 5월 금남로는 피로 물들었다. 전시된 수많은 자료들이 당시의 처참함을 증언한다.


지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군부 독재에 항거했다. 계엄군은 그들을 잔인하게 진압했고, 계엄군에 맞선 이들은 오늘날 5·18민주유공자로 불린다.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은 5·18민주유공자를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행방불명·부상 및 희생된 자’로 규정한다. 2019년 4월 기준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5·18민주유공자는 총 4천413명(희생자 본인 3천603명, 유족 810명)이다. 국가가 휘두른 폭력으로 수많은 시민이 죽거나 다쳤고 생존자는 신체와 정신이 훼손된 채 살아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09년 발표한 「국가폭력과 트라우마」에 따르면, 5·18민주유공자 3명 중 1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 있었다.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찾는 환자들은 ‘당시의 일이 고장 난 테이프처럼 머릿속에서 맴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적 후유증과 신체적 장애보다 이들을 옥죄는 것은 ‘생계유지’라는 현실이다. 5·18민주유공자는 민주화운동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취업 과정에서 차별을 겪는다.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에서 지원한 2013년 ‘국가폭력피해자의 트라우마 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1987년 6월 항쟁 이전 민주화운동 참여자 128명 중 79명(61.7%)이 사회생활에서 차별을 겪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5·18민주유공자 가구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한다. 5·18민주유공자 10명 중 4명은 월 소득 100만 원 이하로 살아가고 있다. 이는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최저생계비 163만 원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전라남도의회는 지난 2017년 6월 조례를 제정해 2018년부터 이들에게 생계지원비를 지급했다. 생계지원비 제도는 일회적인 보상금으로는 경제생활 지속이 어려운 민주유공자 가구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그런데 지난 2017년 기준 전라남도 지역 5·18민주유공자 656가구 중 저소득층으로 분류된 300여 가구가 지원받는 금액은 매달 13만 원에 불과했다. 생계에 실질적인 보탬을 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또 지난 17년간 고문·부상 후유증과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한 5·18민주유공자는 44명이다.

 

국가보훈제도로 가까스로 유지되는 삶,
이를 둘러싼 편견과 억압

 

▶▶5·18 당시 시민군들의 신발과 공수부대원의 군화, 탄환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전시실에 재현돼있다.


국가보훈제도는 5·18민주유공자를 생활고와 각종 정신·신체적 피해로부터 보호한다. 5·18민주유공자는 6·25전쟁, 4·19혁명, 베트남전 희생자와 더불어 독립적인 보훈 대상*으로 인정된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2002년에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과 동시에 5·18민주화운동 피해자는 보훈대상자로 지정됐다”고 설명했다. 보훈 제도는 교육·취업·복지 분야에서 보훈대상자를 지원한다. 

5·18민주유공자 심사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에서 담당한다. 보상심의위의 심사 결과가 나오면 국가보훈처장이 민주유공자를 임명한다.  5·18민주유공자 인정 기준은 엄격하다. 가족 사망, 본인 장애, 구속 및 수감 같은 피해 사실이 입증돼야만 5·18민주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렇듯 5·18민주유공자는 국가보훈제도로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는다. 하지만 ▲민주유공자 심사 절차 ▲연금과 가산점 혜택의 형평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보상심의위원회의 심사 절차를 문제 삼았다. 자유한국당(아래 한국당) 김진태 의원은 ‘지난 1990년 2천224명이었던 5·18 유공자가 현재 4천413명으로 늘어났다’며 ‘주로 광주지역 유지들이 심사하다 보니 선심성으로 심사가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주시청 민주인권평화국 5·18선양과 관계자는 “민주유공자 수가 늘어난 것은 1990년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아래 보상법)이 제정되며 이전에 보상받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유공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상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7차 민주유공자 신청이 진행됐다.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는 5·18 당시 상무대 영창***에 강제 구금됐던 시민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새로운 증거가 확보됨에 따라 7차 민주유공자 신청에서 284명이 추가로 등록됐다.

5·18민주유공자 심사 절차 의혹에서 민주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는 여론도 파생됐다. ‘5·18민주유공자 명단과 공적을 공개하라’는 국민청원은 5천 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모든 국가유공자의 개인정보는 공개 대상이 아니다. 지난 2018년 12월, 서울행정법원은 일부 시민이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5·18민주유공자 명단을 비공개하는 것은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5·18민주유공자들의 사망·행방불명 경위, 부상, 치료내용, 죄명과 복역 기간 등을 공개하는 건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결 사유를 밝혔다. 5·18민주유공자의 연금과 취업 가산점 제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5·18민주유공자에게 주어지는 연금과 취업 가산점이 다른 국가유공자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다는 것이다. 극우 보수 세력 지만원은 ‘5·18민주유공자 자녀가 공무원 7급의 89.4%, 9급의 85.6%를 독차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5·18기념재단은 5·18민주유공자가 받는 혜택이 타 국가유공자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설명한다. 취업 가산점도 마찬가지다. 5·18기념재단 측은 “적게는 3만 명에서 많게는 70만 명이 가산점 혜택을 받는다는 주장은 명백한 왜곡”이라고 밝혔다.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아 합격한 5·18민주유공자의 비율은 전체 국가유공자 합격자의 1.2% 수준이다.

각종 판례와 통계자료는 5·18민주유공자가 여타 보훈 대상보다 많은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5·18민주유공자를 향한 폄훼는 끊이질 않는다. 한국당 김순례 의원은 ‘5·18민주유공자라는 이상한 괴물집단’이라며 명단 공개를 요구했고, 같은 당의 이종명 의원은 ‘5·18은 폭동’이라고 말했다. 이에 관해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박은홍 교수는 “5·18민주화운동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끈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며 “5·18을 지역주의나 색깔론의 관점에서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시도는 시민의식과 어긋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했다.


39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막혔던 진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도 함께 진화했다. 5·18민주유공자의 보훈이 지나치다는 주장은 진화된 역사 왜곡의 단면이다. 5·18민주유공자는 수혜자이기 전에 국가에 의해 폭력을 당한 무고한 희생자다. 타 국가유공자와 달리 5·18민주유공자는 보훈 대상이 되는 것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이데올로기가 충돌한 ‘정치적’ 공간으로 여겨지는 광주를 향한 프레임은 여전히 존재한다.

 

 

*보훈 대상: 독립유공자, 국가유공자, 지원대상자, 보훈보상대상자, 참전유공자, 5·18민주유공자, 고엽제 후유증, 특수임무유공자, 제대군인의 9개 영역으로 구성된다.
**보상심의위원회: 위원회는 광주시장(위원장)·전남대 총장·전남지사·광주지검장·광주교육감·광주지방노동청장 등 6명을 당연직 위원으로 한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상무대 영창: 5·18민주화운동 당시 약 3천여 명의 시민들이 강제 연행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온갖 고문과 구타가 행해진 곳이다.

 

 

글 김민정 기자
whitedwarf@yonsei.ac.kr

사진 양하림 기자
dakharim0129@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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