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중심에 선 연전과 세브란스

100년 전, 3‧1운동의 현장에는 연세인이 있었다. 연희전문학교(아래 연희전문)와 세브란스병원의학교(아래 세브란스) 출신의 청년들은 조선 거리에선 태극기를 흔들고 먼 타국에선 태극기를 가슴에 품었다. 우리신문사는 역사서가 조명하지 않은 연세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 연희전문학교
연희전문은 신(新)하와이라 불렸다. 이는 1910년대 중반 항일 기류가 격렬했던 하와이에 연희전문을 빗댄 표현이다. 특히 지금의 학생회 역할을 수행하던 연희전문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독립운동을 조직하고 주도했다.

1919년 당시 연희전문에 재학 중이었던 김원벽은 연희전문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김원벽은 연희전문 학생들에게 3‧1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1919년 3월 5일에 보성전문의 강기덕과 후속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날 남대문 역 앞에는 조선총독부 추산 4~5천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시위 행렬 선두에 섰던 김원벽은 현장에서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았다.

연희전문 YMCA 사교부장이었던 정석해는 독립선언서를 등사**·배포하는 등 3월 5일 남대문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는 1919년 3월 18일에 만주로 피신한 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대 파리와 독일에서 서양 학문을 공부하면서도 독립운동을 향한 의지는 놓지 않았다. 정석해는 1931년 제네바에 있던 이승만을 파리로 초청해 항일운동을 논하기도 했다. 정석해는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2019년 ‘연세 정신을 빛낸 인물’로 선정됐다.
당시 YMCA 회장이었던 이병주는 김원벽을 도왔다. 그는 3‧1운동과 3월 5일 만세시위를 알리고 학생들을 결집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해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와 임시의정원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 해외로 간 세브란스 출신 의사들
세브란스 출신 의사들은 해외에서 본업을 유지하며 독립운동가로도 활약했다. 의사라는 직업 특성상 활동 자금을 자력으로 마련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의 교류가 자연스러워 감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주현측‧신창희‧곽병규‧정영준‧김창세‧신현창은 의사라는 신분을 활용해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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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1회 졸업생인 주현측은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105인 사건’***에 연루됐다. 이후 1921년에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하며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수탈과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에도 주현측이 독립운동에 꾸준히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1942년 미국 선교사를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한 혐의로 체포돼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1942년 3월에 사망했다.

1918년 세브란스를 졸업한 신현창은 상하이에 ‘해춘의원’을 개설했다. 그는 병원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고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직접 활동하기도 했다. 또 1922년에는 김구‧이유필‧여운형‧손정도‧나창헌 등과 함께 노병회****를 조직해 무장 항일투쟁과 임시정부활동을 지원했다.

이태준은 1911년 세브란스를 졸업한 뒤 안창호와 친분을 쌓아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1914년 몽골로 떠나 의업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몽골의 마지막 황제 복드 칸의 주치의였던 그는 몽골에 만연하던 성병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태준은 몽골에서의 탄탄한 입지를 이용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다.

 

# 세브란스 간호부
세브란스 간호부 청년들의 독립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누군가의 딸과 아내가 아닌, 한 명의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겼다. 세브란스 간호부들은 전문직 여성이자 지식인으로서 항일운동과 여성운동에 헌신했다.

대표 인물로는 정종명이 있다. 정종명은 여성으로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간호부의 길을 택했다. 3‧1운동이 발생한 1919년, 그는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에 재학 중이었다. 정종명은 3‧1운동 중 시위 학생들의 연락을 돕고, 운동을 주도한 세브란스 출신 독립운동가 이갑성의 서류를 맡아둔 혐의로 체포됐다. 정종명의 주체적인 활동은 3‧1운동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1924년에는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해 여성운동을 이끌고, 1929년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정종명 외 세브란스 간호부의 활약도 눈에 띈다. 이정숙은 세브란스에서 3‧1운동 부상자 치료를 돕다 견습간호부가 됐다. 그 후 1919년 11월에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도우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김효순‧이도신‧노순경은 1919년 12월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헝겊을 흔들며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식민지배 당시 민족운동은 목숨을 담보로 했다. 그럼에도 연세인들의 항일운동은 빛났다. 이에 이태훈 교수(인예대‧한국근현대정치사)는 “연희전문과 세브란스는 당시 조선 최고의 사학이었다”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교육을 받는다는 책임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의 활동은 3‧1운동 이후의 항일·사회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이 교수는 “일제강점기부터 4‧19 혁명, 6월 민주항쟁까지 한국사회의 움직임은 청년이 주도했다”며 “지금의 대학생도 과거를 거울삼아 새로운 사회의 지향점을 적극적으로 모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본 기사 작성을 위해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와 지난 2월 열린 교직원 수양회에서 발표된 「연희전문학교의 3·1운동」과  「3·1운동과 세브란스의 독립운동」을 참고했다.
**등사: 잉크를 얇은 종이에 투과해 여러 장을 인쇄함
***105인 사건: 1911년 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이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민족지도자 600여명이 검거, 105명이 기소됐다.
****노병회: 군인 양성·한국 독립군 사기진작 및 독립군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결성된 항일독립운동단체.

 

 

글 노지운 기자
bodo_erase@yonsei.ac.kr
박제후 기자
bodo_hooya@yonsei.ac.kr
박채린 기자
bodo_booy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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