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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의 이면, 친일을 마주하다이분법을 벗어나 친일청산의 의미를 되짚어보다
  • 노지운 기자, 박제후 기자, 박채린 기자
  • 승인 2019.05.13 01:02
  • 호수 1831
  • 댓글 0

우리대학교 교정 곳곳에는 백낙준 초대 총장의 흔적이 남아있다. 중앙도서관 앞에 있는 그의 동상과 그의 호 ‘용재’를 딴 용재하우스가 대표적이다. 지난 1995년 학교본부는 백낙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용재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백낙준은 국학 진흥과 우리나라의 교육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친일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백낙준의 친일, 연세를 위하여?

백낙준은 1927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이듬해 문과 과장을 맡으며 조선어 선택 과목을 편성하고 조선학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1934년에는 조선민족학회·조선어학회에 참가해 국학 연구에 힘썼다. 수양동우회 사건·흥업구락부 사건* 등으로 연희전문학교 교수진이 검거된 1937년, 그는 미국 순회강연 중 일제의 국내 탄압으로 귀국하지 못한 채 2년간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백낙준의 행적은 1940년대를 기점으로 변한다. 그는 1941년 일제의 ‘자발적 황국신민화운동’의 일환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했다. 백낙준은 일제 군자금 모금을 주도한 애국기헌납기성회의 부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듬해 일제가 징병제를 실시하자 그는 조선인의 근로 동원을 장려하는 설교문을 「기독교신문」에 실었다. 그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병참기지로서 조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설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명백한 친일 행적으로 그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그의 친일 행적을 당시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1940년대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에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했다. 조선인의 물자는 물론 생각·사상도 동원 대상이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김민철 교수는 “1940년대는 총동원령이 내려질 만큼 일제의 압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라며 “고려대 김성수, 이화여대 김활란과 같은 학교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동원됐다”고 설명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백낙준도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친일을 피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백낙준의 친일 행적은 개인의 이익과 출세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라며 “일제의 압박 속에서 학교를 지키기 위해 굴복한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 상황이라는 함수

백낙준 초대 총장이 우리대학교에 기여한 바는 많다. 하지만 그 공로를 근거로 친일 행적을 정당화할 순 없다. 김 교수는 “공을 떠나서 친일 행적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며 “본인의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을 통감하는 태도를 보여줬다면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저서 『죄의 문제』에서 죄의 양상을 ▲범죄 ▲정치적 죄 ▲도덕적 죄 ▲형이상학적 죄로 나눈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범죄는 법률을 위반한 행위이며, 정치적 죄는 공동체가 그릇된 방향을 좇는 것을 방관한 죄, 도덕적 죄는 의도를 불문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준 행위에 대해 묻는 죄, 형이상학적 죄는 범죄가 자행되는 와중에 살아있다는 것에서 오는 죄의식을 말한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구분을 통해 비판의 층위를 제시했다. 김 교수는 야스퍼스의 논의를 차용해 식민 통치 당시의 죄를 구분한다. 김 교수는 “이러한 구분은 일제 당시 모두가 유죄라고 치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라며 “모두가 유죄라는 말은 모두가 무죄라는 말과 같다”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하며 이득을 취한 죄와 식민 통치에 순응하고 살아간 죄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논문 「‘친일’문제 – 인식, 책임, 기억」***에서 1940년대 일제에 동원된 지식인 및 유력자를 ‘결과적 친일 행위자’로 규정했다. 그는 이들이 법적 책임에선 자유롭지만 정치적·도덕적 죄는 저질렀다고 말한다. 1940년대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당시 지식인들은 친일 행적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정치적 죄와 도덕적 죄를 저지른 이는 각각 행위 원상복귀의 책임과 속죄·내적 쇄신의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지금’ 친일을 논하는 이유

친일문제를 다시 논하는 것은 단순히 당사자의 흠결을 들추기 위함이 아니다. 김 교수는 “친일청산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갈 것인지를 사유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친일행위의 당사자가 사라진 지금, 친일행위에 책임을 묻는 과정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논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정화’를 통해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화는 개인과 공동체적 문제에 죄의식을 품고 연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족의 과거 행적에 책임을 통감하고 올바른 공동체로 회귀하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역사는 정화와 거리가 멀다. 친일파는 미 군정을 틈타 기득권으로 자리 잡았다. 이승만 정권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해산된 것 역시 친일청산 실패의 기록이다. 이태훈 교수(인예대·한국근현대정치사)는 “한국 사회는 과거(친일문제)를 직시하지 못해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건강한 사회는 객관적 성찰과 인식에 근거한 역사 인식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현대사 속 친일파 청산의 부재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잔재를 남겼다. 건국대학교 이병수 교수(교육대학원·통일교육)는 논문 「친일미청산의 역사와 친일의 내적 논리」****에서 친일청산은 강자를 찬미하는 사회진화론과 전체주의적 감각의 청산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 역시 “여전히 남아있는 전체주의와 힘의 논리는 친일의 잔재”라며 “현재의 친일청산 논의는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를 논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연세, ‘책임지는 사회’?

우리대학교에서도 민족교육선지자 백낙준이 아닌 ‘친일파’ 백낙준의 과거 청산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학교본부에 부딪혀 실패에 그쳤다. 우리대학교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와 신과대 학생회는 지난 2005년 ‘올바른 과거사 청산과 동북아평화를 위한 연세인 모임 추진위원회’(아래 과거사 청산 추진위원회)를 꾸렸다. 이들은 ▲중앙도서관 앞 백낙준 동상 철거 ▲용재관·유억겸기념관 등 친일인사를 기리는 기념물의 명칭 변경계획 ▲백주년기념관에 ‘연세역사 속의 친일인사’ 신설 ▲범 연세 과거사 청산 위원회 구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학교본부는 “친일이 의심되는 학내 인사들의 친일 행적을 미화할 생각은 없지만 그들이 학교에 기여한 바도 무시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1516호 2면, ‘민노당 학위, 친일청산 관련해 학교 측과 면담’> 과거사 청산 추진위원회는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활동을 종료했고, 이후 더이상 교내 친일청산 움직임은 없었다.

우리대학교는 백낙준을 향한 비판을 차단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2014년 ‘서중석 명예교수(성균관대·한국현대사) 용재상 취소 사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우리대학교는 서 교수가 백낙준의 친일 행적을 비판해왔다는 이유로 서 교수의 용재석좌교수 임명을 돌연 취소했다. 당시 홍보팀은 “용재 선생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비판한 서 교수를 용재석좌교수로 초빙하는 것에 이의가 제기됐다”며 “시상식을 보류하고 추후 논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1724호 2면, ‘제20회 용재상 시상식 개최’> 결국 학교 측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이는 백낙준의 친일행위를 바라보는 연세대의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했다.

이화여대와 고려대에서는 최근까지 학생들이 친일청산 움직임을 활발히 주도하고 있다. 이화여대는 지난 2017년 11월 ‘이화여대 친일청산 프로젝트 기획단’(아래 기획단) 주최로 ‘김활란 친일 행적 알림 팻말 제막식’을 열었다. 당시 설치된 팻말에는 김활란 총장의 친일 행적과 함께 팻말 제작에 기부한 1천22명의 명단이 기재돼있었다. 기획단 단장 정어진씨는 “친일 행적 알림 팻말 설치라는 적극적 행동을 통해 학교가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팻말 게시 2주 만에 학교 측은 이를 철거했다. 기획단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해당 팻말은 이화여대 학문관에 전시됐다. 정씨는 “이를 통해 김활란의 친일 행적에 대한 학우들의 문제의식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려대는 지난 2018년 3월 ‘인촌 흔적 지우기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총학생회 차원에서 ‘인촌 김성수 지우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이들은 ▲인촌 김성수 동상 철거 ▲인촌 김성수에 대한 우상화 중단을 요구했으며 단 1주일 만에 2천421명의 서명을 받았다. 지난한 노력 끝에 이들은 고려대 앞 도로 명칭을 ‘인촌로’에서 ‘고려대로’로 바꾸는 데도 성공했다. 고려대 50대 총학생회장 김태구(경영·12)씨는 “총학 차원에서 여러 단체와 연대해 성북구청에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며 “60% 이상의 주민 동의를 받아 도로명 변경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이에 인촌로라고 기재된 도로 명판 107개와 건물번호판 1천519개가 교체됐다.

연세 사회 또한 이러한 흐름을 피해갈 수 없다. 이 교수는 “친일 행적에 대한 인정과 비판은 그의 공적을 없애는 작업이 아니다”라며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현재를 성찰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1937년 6월부터 38년 3월에 걸쳐 일제가 수양동우회에 관련된 180여 명의 지식인들을 검거한 사건.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2009) 백낙준 항목 참조
***김민철, 「‘친일’문제 - 인식, 책임, 기억」,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5
****이병수, 「친일미청산의 역사와 친일의 내적 논리」, 『통일인문학』 76,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8

글 노지운 기자
bodo_erase@yonsei.ac.kr
박제후 기자
bodo_hooya@yonsei.ac.kr
박채린 기자
bodo_booya@yonsei.ac.kr

노지운 기자, 박제후 기자, 박채린 기자  bodo_erase@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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