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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주 한 사발에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다동동주와 다산(茶山) 정약용 이야기
  • 김현지 기자, 정구윤 기자
  • 승인 2019.05.13 01:01
  • 호수 49
  • 댓글 0

명절마다 운전대를 잡았던 고모부의 귀향 후 일과는 항상 같았다. 그는 장시간의 운전 뒤에도 눈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고모부는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갓 부친 전에 동동주를 곁들여 마셨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시골에는 항상 동동주와 따뜻한 부침개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피곤한 눈에는 ‘몸아, 네가 아무리 졸려봐라. 내가 눈 붙이나 동동주 따라 먹지.’라는 의지가 서려 있던 것 같다. 지금은 뭐, 신기하다기보단 동동주가 그에게 나름의 회복제였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나의 ‘동동주 회복제설’이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역사 속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이다. 혹자는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이 주모와 동동주라고 말한다. 오랜 시간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다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길에 오른 다산. 낯선 곳으로 귀양을 간 그를 받아준 것은 주막집의 노파와 그가 따라주는 동동주뿐이었다.

주모는 유일하게 죄인 신세의 다산을 감싸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주막집 뒷방을 다산에게 내준다. 다산은 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의재’는 ‘맑은 생각, 단정한 외모, 적은 말수, 신중한 행동을 유지해야 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는 다산이 주모와 동동주 한 잔에 담소를 나누다가 훈계를 듣고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맑은 생각과 단정한 외모, 신중한 언행은 우리 인식 속 ‘술에 기대 사는’ 사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동동주에는 여타 술과는 다른 차분한 매력이 있었나 보다.

‘정조가 다산에게 『팔자백선』, 『국조보감』, 『대전통편』 등을 얻었느냐는 질문에 모두 얻었다고 하자… 내가 줄 책이 없구나 하고 크게 웃은 뒤 술을 가져오라고 말하자 계성주를 큰 사발에 가져왔다. 다산이 술을 잘 못 한다며 사양하자 정조는 명을 내려 다 마시게 한다. 술이 몹시 취해 비틀거리자 내시감에게 부축해 나가라 명하고 빈청에서 쉬게 해주었다’

-다산 정약용 평전(박석무 선생)

다산은 술을 좋아했지만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는 취해서 비틀거리는 아들에게 훈계하는 편지를 보내고, 임금이 술을 하사해도 정도를 지켰다고 한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입술과 혀를 적시며 천천히 술을 음미하고, 살짝만 취한 상태에서 담소를 즐기는 것이 지혜롭고 멋진 술꾼’이라고 말한다.

적당한 취기만을 즐긴 다산이 유독 동동주를 좋아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동동주의 맛이 유독 차분하고 깔끔했던 걸까, 어머니 같은 주모가 따라주는 술이어서 그랬던 걸까. 이유야 어찌 됐든 다산은 동동주를 벗 삼아 지냈다. 그는 동네 아이들이 뱉는 침을 맞고, 친형의 죽음에 대성통곡하면서도 후대에 전할 가르침을 책으로 남겼다. 그가 유배 생활 동안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펴낼 수 있던 건 주모와 동동주라는 벗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도 동동주를 한 사발 들이키면 지금의 고민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기자는 서늘한 초여름 낮에 신촌 ‘연대포’를 방문해 동동주를 맛봤다. 동동주의 맛은 단연 매력적이었다. 첫맛은 구수한 듯 달달했지만, 마지막엔 알싸하게 알코올 향이 퍼졌다. 달짝지근한 첫맛이 생각나 손이 계속 술잔으로 향했다. 동동주는 도수가 높은 것에 비해 그 맛은 달고 맑다. 취한다는 느낌보다는 기분이 나아진다는 느낌에 가깝다. 고모부와 다산이 왜 동동주를 마시고도 차분할 수 있었는지, 더 이상의 취기를 원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쌀로 빚어서인지 은근한 포만감도 준다. 든든한 느낌과 달콤알싸한 맛은 유배생활의 척박함을 달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동주는 시대를 막론하고 긴 여정을 달래준다. 누군가는 동동주로 귀성길 운전의 피로를 달래고, 누군가는 18년의 유배 생활을 버텨냈다. 동동주를 만드는 과정에도 역시 기다림의 미학이 배어있다. 우선 밀로 누룩을 만들고 쌀로 고두밥을 짓는다. 누룩과 고두밥을 물과 섞으면 고두밥이 발효된다. 상온에서 2주일이 지나면 삭은 고두밥은 가라앉고 맑은 액체가 위로 떠오른다. 고두밥이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쌀알과 술을 함께 떠내면 동동주가 된다. 동동주를 빚는 시간은 어쩌면 마음의 여유를 빚는 시간이다. 『한국의 전통명주 3: 전통주 비법 211가지』는 ‘주재료인 쌀을 빻아 만든 흰무리로 빚은 동동주는 3∼4일의 짧은 발효 기간을 통해서는, 설사 술 빚는 이가 ‘귀신’이라고 하더라도 본디의 동동주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간한 인내심과 차분함이 없으면 동동주는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술은 혼돈 속에도 학문을 닦으며 기다림을 실천한 다산의 지혜와 닮아있다.

정호승 시인은 「다산주막」이라는 시에서 힘들고 괴로울 때 “술병을 들고 고층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무릎을 걸어서라도 다산주막에 가라”고 말한다. 진정한 ‘취객’이란 이런 게 아닐까. 진정한 취객은 술로 차분함을 배우고 삶의 고달픔이 가시기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술로 슬픔을 잊으려 하기보단 침착하게 아픔을 희석하는 사람. 다산은 슬픔 속에서도 차분하게 학문을 닦았다. 괴로운 시간이 찾아오면 동동주를 마시며 다산의 가르침을 곱씹어보자. 동동주를 사랑하던 그가 실천한 기다림의 정신을.

글 김현지 기자
hjkorea0508@yonsei.ac.kr

사진 정구윤 기자
guyoon1214@yonsei.ac.kr

김현지 기자, 정구윤 기자  hjkorea0508@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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