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주 사회부장 (사복·17)

#성장
무능이 죄가 되는 사회다. 고난이나 갈등을 극복하고 성장한 사례를 묻는 자기소개서가 그 증거다. 어떤 시련이든 딛고 일어나 성장한 사람이 바로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이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무능은 죄악’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2년간의 기자 생활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일까. 무능을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써왔다.

무능이 죄악이라는 생각은 대학 입학 후 더욱 확고해졌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리신문사에 입사했다. 무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을 향한 수많은 채찍질을 악착같이 버텨냈던 2년이다. 기자 생활을 하며 원하는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발버둥 치기도 했다.

나의 무능을 받아들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갈등 극복 후 성장 과정을 묻는 문항에서조차 나는 솔직하지 못했다. 그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나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포장하기에 급급했다. ‘배운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을 내내 들어왔던 탓일까. ‘성장’은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였다. 그런 나에게 시련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진정한 나를 소개할 용기는 없기에 나를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포장하려 애썼다. 그럴 때마다 ‘진짜 나’는 빛을 잃어갔다. 있는 그대로의 무능한 나는 매력적이지 않을 거라는 자기 비하 속에서.

 

#행복
성장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무능한 내가 싫었다. 그래서 나는 성장을 넘어선 또 하나의 목표를 만들었다. ‘행복’이었다. 한 번뿐인 인생, 다 행복해지자고 하는 일 아닌가.

생각해보면 성장의 과정이 꼭 행복하지 않았던 것만은 아니다. 매번 나를 극한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매주 ‘불금’, 친구들이 술집에서 밤을 새울 때 기사를 쓰겠다며 춘추에 남아있던 지난날의 나는 분명 행복했다. 내게 있어서 성장과 행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보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렇게 성장과 행복은 내 삶의 중요한 기준이 됐다. 입학 이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몸담아온 춘추 생활은 이를 견고히 하기에 충분했다. 성장이 행복을 갉아먹는다면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위로했지만, 어느 방면으로든 성장이 없으면 행복도 없었다.

다시 말하건대, 춘추에 들어온 이유는 단순하다. 열심히 살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기사를 고쳐보겠다며 밤을 지새울 때도, 심지어 취재원이 나의 무지함을 욕할 때도 그다지 상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매일 더 성장하자고, 더 행복해지자고 다짐했다. 무능한 나도, 갈등과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나도 결국엔 모두 나였다. 그 덕분에 얻은 게 하나 있다. 이젠 자기소개서 항목에서 ‘성장과정’은 포장하지 않고도 쓸 수 있으리라.

하지만 성장과 행복이 함께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행복해지겠노라 다짐했지만, 나를 쥐어짜는 게 습관이 됐나 보다. 아직도 나는 성장과 행복 사이, 그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다.

 

춘추에서의 마지막 글이다. 멋있어 보이기 위해, 또 한 번 나를 포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글쓰기를 그렇게 싫어하는 내가, 글을 쓰면서도 나름의 행복을 느껴보자고. 이것이 성장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나만의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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