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16)

지난 2016년 말부터 2019년 2월까지 카메라와 망막에 영도를 담기 위해 매달 1회 이상 답사를 했다. 영도구에 직접 발을 디딘 적도 많았고, 영도를 바라보기 위해 부산의 해안가와 전망대에 간 경우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3~40회에 달한다. 자연스럽게 영도구에 대해 단순한 시각적 감상을 넘어 다양한 정보도 찾아봤고 지식도 쌓게 됐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이 지면을 빌어 독자들과 영도에 대한 사소한 것들과 감상을 조금이나마 공유해 보려 한다.

 

부산 지하철 1호선 남포역 7번 출구에서 왼쪽으로 돌아 나가면 아무도 보지 않는 조그만 검은 비석이 놓여 있다. 19세기 말 본교의 설립자 언더우드와 알렌, 아펜젤러가 한반도에 첫발을 디딘 곳이라고 한다. 여기서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는 영도대교를 마주할 수 있다. 하늘이 맑은 날 오후 영도로 들어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면 쏟아지는 햇살과 푸른 바다, 남쪽으로 펼쳐진 봉래동의 달동네 모습과 북쪽에 보이는 남포동의 모습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영도대교를 건너온 다음 계속 직진하다 대교동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15분을 걸어가니 영도의 북서쪽에 펼쳐진 해안 산책로가 있다. 이른 시간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역광 없는 사진을 찍기 좋고, 오후가 되면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절영해안산책로와 흰여울길의 접점에서 끝이 난다. 필자는 바다를 옆에 두고 천천히 걷고 싶을 때 전자를, 자연광의 도움으로 좋은 사진을 찍을 때는 후자를 선택했다. 영화 『변호인』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흰여울길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의 마을과 오른쪽의 바다가 만드는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길 끝에 나오는 흰여울해안터널을 지나면 4·3사건으로 인해 제주도에서 대피한 이들이 생업을 위해 만든 해녀촌이 아직 남아있다.

 

당시에 많은 제주도민이 영도에 자리 잡았다. 덕분인지 영도에 가면 부산 유일의 제주은행 지점도 있다. 영도에 서려 있는 역사의 흔적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 해방된 포로들이 지금의 청학동 해돋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달동네의 모습을 간직한 마을의 위에는 전망대 건물이 홀로 자리하고 있다. 과거의 흔적이 지금은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찾는 장소가 됐다. 이곳은 부산역에서 오륙도까지 남해안의 최동단 해안선을 조망할 수 있다.

이 모든 장소는 봉래산으로 귀결된다. 봉래산이 있기에 영도가 됐고 그 자락을 따라 사람들의 흔적이 생겨났다. 봉래산 정상의 경치는 두말할 것 없지만, 제한된 시간을 생각하면 부산타워나 황령산이 나을지도 모른다. 서쪽으로는 가덕도에서 명지와 다대포를 지나 송도 그리고 자갈치시장까지, 동쪽으로는 부산역과 신선대부두에서 달맞이고개까지 부산에서 유일하게 부산의 모든 해안선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곳이지만, 다른 산들에 비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듯하다.

영도의 남쪽에서는 태종대와 해양박물관이 인상적이다. 먼 옛날 신라시대 김춘추가 활을 연습하던 태종대는 꽤 오랫동안 명소로 자리매김한 영도의 터줏대감 같은 존재다. 길을 따라 열차나 도보로 한 바퀴 돌아도 좋고, 중간에 전망대나 등대에 방문하면 부산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절벽과 기암괴석, 그리고 탁 트인 대한해협이 인상적이다. 태종대에 가기 전에 해양박물관에 방문하면 다양한 해양과학 전시물과 아쿠아리움이 있다. 그리고 박물관 뒤로 나가면 부산이 항구도시임을 체감할 수 있는 장소가 기다리고 있는 만큼 한 번쯤 방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임진왜란 이후 무인화된 영도는 구한말 러시아의 군사시설이 들어올 위기를 맞기도 하고, 일제강점기 일본군 부대가 주둔했던 아픔도 겪었고,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피란민이 몰려들어 오면서 오늘날의 영도가 됐다. 역사와 함께한 영도가 주는 감상을 한 페이지 남짓한 이 글이 온전히 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도 언젠가 꼭 직접 느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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