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사회
'열어주는' 사회와 '여는' 사회『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말하는 시민과 민주주의
  • 강우량 기자, 양하림 기자
  • 승인 2019.04.01 01:35
  • 호수 1829
  • 댓글 0

“같이 민주화투쟁 하며 기껏 고생함시러도 시상에 밥풀때기가 뭐라요, 열통터지게”

-『열린 사회와 그 적들』 中


지난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민주화 운동은 고결한 이름들을 낳았다. 이한열, 박종철, 그리고 노수석. 그 영광된 이름 뒤에는 비루하고 낮은 존재로 죽어간 이들이 있다. 기성 질서의 그늘 아래 이름 없이 남겨진 그들을 되살리고자 김소진의 소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속에 그려진 충무로와 명동 일대로 향했다.

숭고한 죽음과 쓸모없는 삶들

▶▶지난 1958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학극장


칼 포퍼(Karl Popper)의 저서와 제목이 같은『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고(故) 김귀정 열사 사망 사건을 소재로 한다. 지난 1991년 5월, 민주화 운동 세력은 충무로역 대한극장 앞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쳤다. 시위에 참여한 김 열사는 최루 가스가 자욱한 골목에서 진압을 피해 달아나다 압사했다. 동료들은 백병원으로 시신을 운구해 부검을 강행하려는 경찰과 대치했다.

▶▶산화한 김 열사의 시신은 백병원으로 운구됐다.



소설은 이들이 백병원으로 이동한 시점부터 시작한다. 기자는 앞서 시위가 있었던 대한극장을 찾았다. 극장 맞은편에는 옛 경찰서 건물이 자리했다. 대로를 두고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했던 당시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경찰이 쏜 최루탄은 9백여 발에 달했다. ‘백골단’이라 불리는 특수 부대는 시위대를 향해 매섭게 곤봉을 휘둘렀다. 공권력의 폭력으로 죽어간 익명의 ‘열사’들은 김귀정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져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익명의 열사에게도 자격은 필요했다. ‘시민’이 아닌 존재들은 열사가 될 수 없었다.

▶▶대한극장 맞은편, 비 오는 골목 거리 끝에 위치한 옛 경찰서 건물


“당신들 밥풀때기들 때문에 민주화 시위가 일반 시민들한테 얼마나 욕을 먹는 줄이나 아쇼? 당신들 도대체 누구, 아니 어느 기관의 조종을 받고 이런 망나니짓을 하는 거요?”

부랑자나 일용직 노동자들은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밥풀때기’라고 불리며 홀대당한다. ‘밥이나 빌어먹고 다니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여기저기 민폐를 끼치고, 개인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몰상식한 존재로 여겨졌다. 시위 대표 연석회의에 참여할 권리도, 단상에 올라 발언할 권리도 없었다. 그저 시위장에서 나눠주는 주먹밥이나 받아먹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됐다.

“이제는 우리 시민들이 나서서 저런 밥풀때기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고 마침 검찰에서도 수사 의지를 밝힌 만큼 적극 수사에 협조해서라도 정화를 하든지 해야지”

시위 주도 세력은 그들을 시위대에서 쫓아내려 했다. ‘건전한 시위’를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부 시민은 권위주의 정권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들을 몰아내려 했다. 그렇게 시위 행렬에서 밀려난 밥풀때기들은 경찰의 진압 앞에 무력했다. 대한극장 주변 골목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경찰이 작정하고 ‘토끼몰이’를 하면 도망갈 방법은 없었을 터다. 그렇게 밥풀때기들은 백골단의 곤봉질에 쓰러져갔다.

‘우리’의 민주주의와 ‘당신들’

지난 1970년 이래로 권위주의 정부는 성장 우선주의를 기조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제했다. 이를 통해 축적된 부는 정부가 통제하는 금융 기관으로 향했고, 거대 기업의 자금으로 쓰였다. 이는 극심한 양극화로 귀결됐다. 밥풀때기들은 그 구조의 극단에 위치했다.

“지가 뭐 은행에 알토란처럼 묻어둔 통장이 있남요...(중략)...거미줄 한 올 같은 인연도 없어라”
“은행이 배고픈 사람 구제하는 건 고사하구 재벌들 돈 대줘서 땅투기나 허게 하고…
문제는 돈이지. 독재도 칼자루 쥔 놈들끼리 잘 먹고 잘살려고 허는 거고 민주화 투쟁은 그와는 다른 맘에서 잘 먹고살려는 건데”

밥풀때기들은 민주화가 빈곤의 굴레를 끊어내길 바라며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양극화는 우리 사회의 질서가 됐고, 민주화 시위는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멀어졌다. 6월 항쟁 이후 시민운동은 참정권 확보와 부패 척결에만 국한됐다. 밥풀때기들이 간절히 바랐던 경제 민주화나 사회 안전망 구축 같은 의제들은 밀려났다. 시위 문구는 ‘혁명’과 ‘타도’에서 ‘평화’와 ‘퇴진’, ‘자유’ 등으로 옮겨갔다. 민주화 시위의 도구였던 ‘폭력’은 배척되고 시위는 질서를 준수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민주화 시위와 한국 민주주의는 ‘질서’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밥풀때기들은 ‘우리’의 민주주의로부터 배제됐다. 밥풀때기들이 희망했던 변화를 향한 민주주의는 없었다. 질서에 따르지 않는 그들을 향한 시선은 싸늘할 따름이었다. 밥풀때기들은 동료 시민도, 시위에 함께한 동지도 아니었다.

“아무도 용감하게 나서서 싸우지도 않는데 누가 거저 나서서 그런 자유와 평화를 선떡 돌리듯 집어 준답니까? 이마빡이 터지도록 허벌나게 싸워도 될까 말까 한데…”

“민주화 시위도 이제는 마구잡이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이렇다 할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어느 정도 룰을 지켜야 하는 경기나 마찬가지란 말이오...(중략)...이따위로 나오면 우리는 당신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어”

‘당신들’에겐 주어지지 않았던
‘권리를 가질 권리’

“열린 사회라는 건...(중략)...개개인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질적으로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 물질적 풍요와 평등을 이룰 수 있는 마당이며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눈뜬 다수에 의한 착실하고도 양심적인 사회 운영이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오.”

충무로 옆에 위치한 을지로에선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민들의 분노가 담긴 현수막은 여느 재개발 지역과 다름없이 등장했다. 우리 사회는 주거권 확립을 요구하는 철거민들에게 ‘질서 있는 퇴거’를 명령한다. 질서 있는 민주주의를 향한 요구는 퇴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 개방을 꿈꾸는 성소수자들의 행진을 향해 건전한 성 풍속을 해친다며 욕설을 내뱉는다. 성평등을 외치는 여성들에게 가부장적 성 위계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적 질서를 명분으로 소수자 권리 보호 기구를 없애기도 한다. 명동성당 부속 건물에 나부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도회’ 현수막에선 왠지 모를 답답함만 느껴졌다.

시위대는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에 은신했다.


“당신네들 지금 자꾸 어려운 말을 씀시롱 머릿속을 헷갈리게 하는데 한번 물어나 봅시다. 우리, 우리 하는데 도대체 거기 낄 수 있는 축은 누가 되는 거요?...(중략)...못 배우고 빽줄 없는 떨거지들은 여전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할 게 불 보듯 뻔한데 뭐가 진정한 사회란 거요?”

무수한 사례를 관통하는 하나의 논리는, 민주 사회에서 쌓아 올린 질서는 불가침하다는 것이다. ‘약자도 질서는 지켜야 한다’는 말이 가능한 배경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질서를 준수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바로 기성 질서기 때문이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모든 시민권의 출발이라 주장했다. 어떤 권리를 가지기에 앞서, 그 권리를 마땅히 소유할 수 있는 존재임이 인정돼야 한다는 말이다. ‘권리를 가질 권리’가 존재하는 사회는 누군가 열어준 공간이 아닌, 시민이 권리로 여는 공간이다. 시민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할 주권자로 재탄생한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질서’에서 벗어나 ‘변화’가 된다.

“제발 그만둬, 이 바보 멍충이야. 열리긴 뭐가 열렸다는 거야. 다 닫혔어, 다 닫혔다구.”

밥풀때기들은 주류 시위 세력이 쫓아내면 쫓겨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권리를 가질 권리’는 없었다. 밥풀때기들의 민주주의는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들의 변화를 포용하려 하지 않았다.

“예, 변사입니다. 타살이냐구요. 그냥 실족사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무직자인 것 같은데, 저 백병원 근처에서 노숙을 하던 밥풀때기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 그럼…”

소설은 박상선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자해를 의심받았던 최루탄 피격자다. 등장할 때마다 건강 이상을 호소하던 그의 직접 사인은 ‘실족사’였다. 그의 죽음은 누구에게도 숭고하지 않았다. 그저 잘못 미끄러져 죽음에 이른 운 없는 노숙인 정도로, 그렇게 잊혔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김 열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강경 진압의 희생자이자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한 사람의 열사였다. 그의 민주주의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아니었기에, 숭고한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지금도 우리는 익명의 존재들을 잊어가고 있다. 변화가 존중되는 민주주의에서야 그들은 비로소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글 강우량 기자
dnfid0413@yonsei.ac.kr

사진 양하림 기자
dakharim0129@yonsei.ac.kr

강우량 기자, 양하림 기자  dnfid0413@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