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강 보도부장 (보건행정/사복·17)

#왜냐하면
‘장래희망’을 적는 칸을 보면 여전히 주춤한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도, 학회나 동아리 따위의 지원서에도, 오늘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주고받는 질문에서도 여전하다. 나의 장래희망을 묻는 말에서 나는 핵심 없는 변두리투성이 답변만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멋진 장래를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찰떡같은 천직과 영화에 나올법한 사랑 이야기는 살다 보면 당연하게 맞이할 일일 것만 같았다. ‘장래희망’이 언젠가는 내게 뚜렷하게 찾아올 걸 아주 열망했기에 뜻하던 바가 엉클어질 때는 홀로 한없이 침몰할 때도 잦았다.
 

#그래서
어떤 업(業)을 하고 장래를 살 건지란 질문에는 여전히 답을 못 내리겠다. 최근에야 나와 적당히 타협한 것이, 우선 ‘어른’이 돼보자는 것이다. 우습지만 장래희망을 찾기 위한 ‘장래희망의 희망’ 격인 셈이다.

스물을 넘긴 지가 꽤 됐는데 웬 어른 타령이냐는 혹자의 질문이 예상된다. 어른의 어원을 따라가 보자. 어른은 옛말 ‘얼우다’에 접미사가 붙은 ‘얼운’에서 유래한다. 얼우다는 곧 남녀의 혼인을 의미한다. 남녀가 혼인했다는 말은 예전의 관점으로 곧 ‘충분히 다 자란 사람’을 가리킨다. 어른과 유사한 뜻으로 통하는 ‘성인(成人)’도 한자어 그대로 ‘무언가를 이룬 사람’을 지칭한다.

사전적 의미를 되새겨보니 확실히 어른이라는 단어에 잠정적으로 내포된 뜻을 모두 이루지 못했다. 몸은 다 자랐어도 정신머리가 성숙하기란 한참 멀었고, 무언가를 이뤄놓지도 못한 듯하고, 예전 조상의 관점인 혼인을 통한 얼운다는 지금의 나에겐 더더욱 턱도 없는 소리다. 이런 나에게 어른 지위를 덜컥 줘버린 우리나라 법과, 밀린 과제처럼 나이를 차곡차곡 쌓아주는 새해만이 야속할 따름이다.
 

#그런데
철없던 소싯적엔 포경수술을 하고 군대를 다녀오면 누구나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소년이 나름대로 정한 (남자로 태어난) 어른의 기준이었다. 지금에서야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되돌아보니 아빠가, 형아가, 그리고 목욕탕에서 본 아저씨들이 그래서였다고 생각한다. 어린 나와는 꽤 다른 모습의 신체와 언변, 행동 따위를 단순히 어른의 기준이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어린 시절 내가 바라봤던 그들과 얼추 비슷한 시선에 올라섰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고 시선뿐만 아니라 어른을 규정하던 나만의 생각도 사뭇 달라졌다. 책임, 배려, 인정, 재고, 역지사지, 선…. 다양한 가치가 어른의 뒤에 따른다. 이쯤이면 슬슬 장래희망을 찾기 위해 어른이 돼야겠다는 타협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더 큰 목표를 잡은 것 같다. 업은 있어도 어른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만연한 세상도 이제쯤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어른에 대한 자기만의 정답을 찾고자 분주해 보인다. ‘충분히 다 자란, 그리고 무언가를 이룬’이 남긴 과제에 대한 답변을 내놓고자 고민한다. 『어쩌다 어른』과 같은 TV 프로그램이 공감을 사고 서점에 홍수처럼 범람하는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사회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일상과 일생에서 어른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 중이다. 그래서 모든 걸 성숙하게만 생각하고 완벽히 이해하려 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아직도 생각은 어리고 마음은 좁다.
 

생은 짧다는데 어른이 되기란 길어 보인다. 이 글에도 어른을 꿈꾼 계기로 시작해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막연하고 장황한 생각까지 펼쳐져 있다. 많은 내용을 욱여넣었다. 이야기에는 서론과 결론이 있고 글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만, 이 한쪽 글은 어떻게 결론을 맺어야 할지 캄캄하다. 어른 되기란 목표도 그렇고, 어른 되기란 목표에 대한 글쓰기도 어린 나에겐 힘든 과제다.

그러나 ‘어른’을 계명으로 삼고 지키고자 하는 생각만은 분명하다. 어른이 되겠다는 목표를 어리게 얼버무려보며 이 글을 맺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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