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할 권리

장지민 (국제관계·16)

지난 1997년 12월 4일, 한 환자가 보라매병원 중환자실로 후송됐다. 병원 측은 수술을 진행했으나 환자는 뇌부종으로 인한 호흡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연명치료를 계속하면 상태는 호전될 전망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환자의 보호자인 아내가 나타나 ‘자신의 동의 없이 수술이 진행됐고’, ‘경제적 여유가 없음’을 주장하며 환자의 퇴원을 희망했다. 의료진은 환자의 죽음에 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에 서명하고 퇴원을 진행했다. 이후 사망한 김씨는 병사가 아닌 변사로 처리됐고, 환자 부인의 올케가 보호자를 신고해 경찰 조사가 이뤄졌다. 

법학도들에게는 유명한 판례이며, 한국에서 존엄사와 관련된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사건이다. 존엄사는 안락사와 명백하게 다르다. 존엄사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신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를 거쳐 더 이상의 연명치료를 거부함을 의미한다. 중단할 수 있는 연명치료란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및 항암제 투여 등의 의학적 시술이다. 연명의료를 중단하더라도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 행위나 영양분 공급, 물 공급, 산소의 단순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반면, 안락사는 약물을 투여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줄이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포함한다.

상기한 사건과 지난 2008년 김 할머니의 사건을 통해 볼 수 있듯이 한국은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해 엄격하고 예민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점차 인식이 변화돼 2017년 시범 시행을 거쳐 2018년부터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사람들은 시행 5개월 차인 같은 해 7월, 3만 4천974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연명의료로 인한 부담을 가족에게 지우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택하고자 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인위적인 생명 연장은 남겨진 가족과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지킨다는 측면에서 지양되고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는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고대 일본의 산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에서는 두 종류의 죽음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오린’과 ‘마타얀’이라는 노인의 죽음이다. 오린은 자신이 건강해서 식욕이 남아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치아를 고의로 바위에 부딪쳐서 깨뜨리기까지 한다. 그는 오로지 70세가 되기만을 기다린다. 70세에 나라야마의 산속으로 업혀가면 신과 만난다는 마을의 관습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70세를 맞이하자,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재촉해 산속에서 정좌를 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오린의 자신의 선택에 따른 죽음과는 달리, 마타얀의 죽음은 타율적이다. 피동적이다 못해 그의 죽음은 일면 추하고 비굴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난 2014년 겨울, 요양원에서 세상을 등진 나의 할아버지 역시 오린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속초에서 군수로 반평생을 공무원의 의무에 충실했고, 그곳에서 크고 작은 서사를 이뤄낸 가족의 기둥 중 하나였다. 그는 내게 훌륭한 할아버지였고, 손자들을 끔찍이 사랑했으며, 병치레 중에도 가족에게 어떠한 금전적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나를 마지막으로 만난 순간 “속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걱정에 저지된 그의 바람은 어쩌면 언덕 너머의 바다를 등진 그의 집에서 생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숭고하고 존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세상에 날 때는 선택권이 없다. 자신의 결정에 따라 생을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은 어떨까? 인간은 고통 속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남겨진 가족과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위해 죽음을 수용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의 욕구가 있다. 하지만 생물학적 수명 연장 외에 더는 삶의 여지가 없는 중병 환자의 경우, 죽음을 향한 주체로서의 의식보다는 객체로 전락하는 과정만이 남아있다. 결코, 생명을 향한 투쟁이 추하다는 뜻이 아니다. 불꽃이 마지막까지 타오르듯, 생을 위한 투쟁도 충분히 존중하며 존엄을 지킬 방법의 하나라 생각한다. 분명 그 선택에도 많은 사연이 얽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남은 시간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며 돌아볼 권리를 존중하는 것 또한 사회가 개인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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