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재 편집국장 (문화인류·17)

성추행으로 물의를 빚은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가 ‘정직 3개월’ 처분을 받았다. 학생들은 교수를 파면하라며 징계 조치에 항거했고 교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딘가 익숙한 서사다. 얼마 전에 사직한 우리대학교 문과대학 A교수가 뇌리를 스쳐 간다. 교수가 학생을 성추행하고 학생들이 징계 결과에 분노하는 일은 어느덧 대학 사회의 클리셰로 자리매김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필자는 첫차를 타고 문과대학으로 향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머금은 연구동에는 10명 남짓한 학생이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앉아 있었다. A교수의 성추행과 성희롱을 고발하는 ‘포스트잇 액션’을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아침 8시가 되자 그들은 준비해둔 포스트잇을 연구실 외벽에 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서슬 퍼런 기세는 카메라를 들자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당사자들의 신원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겨우 취재를 재개할 수 있었다.

‘포스트잇 액션’을 담은 사진은 「연세춘추」 1809호에 실렸고, A교수는 사과하지 않은 채 교정을 떠났다. 피해자들은 혹여나 신상이 들통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갔다. 이런 행태는 강의실 안팎의 권력 관계에 기인한다. 일례로, 강의 진행 여부는 교수의 출근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학계에 남고자 하는 대학원생은 특정 교수에게 지도를 받는다. 이들은 교수 개인의 승인이나 도움이 없으면 연구를 지속하기 어렵다. 강의실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교수가 학생에게 모종의 위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권력 관계에 젠더 위계가 중첩되자 중립성이 ‘이성적인 논객’을 가리는 잣대로 떠올랐다.

피해 사실이 공론화되자 ‘A교수의 말을 들어보기 전까진 모른다’, ‘즉각적으로 피해 사실을 고발하지 않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공론화하는 저의는 뭐냐’, ‘학생들의 증언이 거짓이어서 교수의 신세를 망치면 어떻게 하냐’는 여론이 생겨났다. 학생들에게 피해 사실을 증명하라고 묻지 않는 이들은 한쪽 입장만을 듣는 비이성적인 논객으로 치부됐다. 학생들은 평소에 교수와 수직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애써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교수의 연구비 횡령이나 갑질, 폭언 사실을 공론화했어도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남교수가 여학생들을 성추행·성희롱했다는 사실은 남교수와 여학생 간 위계가 아닌 개인 대 개인 구도로 치환됐다.

당위(當爲)는 ‘마땅히 돼야 할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조건이 없고 맥락이 삭제된 당위는 맹점을 지닌다. 사회는 당위와 평서문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립은 분명 수호해야 할 가치다. 하지만 주체 간 최소한의 평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중립은 자연스레 강자의 편에 선다. 약자를 강자와 같은 위치로 격상시킨 뒤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중립성은 일시적으로 여학생을 남교수와 같은 위치에 놓는다. 그리고는 묻는다. 왜 당신과 동등한 지위를 지닌 이에게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교수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미투 운동이 한국에 상륙한 지 어언 1년이 흘렀다. 여전히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는 감정에만 호소하는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취급된다. 당사자성이 없는 남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일은 극히 일반적이다. 필자가 별다른 신변의 위협을 받지 않고 이런 글을 쓰는 것도 궤를 같이한다. 수많은 피해 학생은 ‘감정적’이라는 이유로 각종 평서문의 교차를 지켜봐야만 했다. 당위의 수호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사자가 감정을 배제하고 자신의 처지를 논할 수 있는가. 맥락을 배제한 ‘이성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위계라는 맥락이 삭제된 중립은 약자에게 비현실적인 용기를 요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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