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정 교수 (우리대학교 정치외교학)

2019년, 기형도 시인 30주기다. 정외 79학번이니 입학도 올해가 꼭 40년이 되는 해다. 나는 기형도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나의 졸업은 지난 1979년 2월 말이었고, 그 며칠 뒤 기형도가 입학했기에 함께 대학 생활을 하지 않았다. 정외과 학생으로 ‘연세문학회’에 참여했다는 공통점이 있긴 했으나, 활동 시기가 겹치지 않았으므로 정치학도가 문학의 길을 두드린 연유에 각각 무엇이 닮았고 어떻게 달랐는지 문답해볼 기회는 없었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것이 1989년 여름이었는데, 기형도는 같은 해 3월 유명을 달리했다. 선후배들을 통해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천재성과 천재의 요절에 관한 이야기였다.

서른을 넘기지 못했던 청년 기형도. 그의 글들은 무엇을 필사적으로 증언해 보이려 했을까 고민해본다. 인간이 살아 숨 쉬는 행위, 그리고 삶의 곁에 숙명처럼 붙어있는 죽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개인사를 짓눌렀던 역사에 대한 증언이었을 것 같다. 절망과 죽음이 지배하는 시대가 단지 1980년대만은 아닐 것이다. 죽음이 삶과 영속적으로 결합했다는 사실과 이승의 문명 세계가 위기의 시대로 내몰리고 있음이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청년 기형도는 삶과 죽음의 불가분성에 대해 처절하게 고뇌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전투를 치르듯 시구 하나하나에 단단하게 절망을 담았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표현했던 것처럼 “유리병 속의 알약이 쏟아지듯” 세상을 떴다.(「위험한 가계」) 그는 자기 죽음을 모든 사람의 삶에 현재화했다.

그는 죽음을 시 문학 영역에서 철학과 만나게 했다. 따지고 보면 죽음만이 인간 실존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생명이 죽음과 맞물려 있다는 점은 인간에게 가장 예측 가능한 전망이다. 그러한 진실을 그는 직시했다. 그러므로 그의 삶과 영혼은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었음을 숨기지 않는다.(「오래된 서적」) 그의 데뷔작 「안개」도 삶이 죽음과 무수히 얽혀져 있음을 그리고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아이들처럼 그 자신도 모순으로 덮여있는 “안개의 군단” 속을 걷고자 했던 선언이었다.(「안개」) 그러나 어찌 두렵지 않았겠는가. “내 입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라고 자백했으니 말이다.(「입 속의 검은 잎」)

이별은 그에게 죽음의 다른 표현이었다.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고 자탄한다.(「오래된 서적」) 이별은 잃어버린 사랑을 “빈 집에 가두”어 두는 일이다.(「빈 집」) 절연과 상실은 열망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선포하는 일이다. 그래서 “짧았던 밤”, 창밖의 “겨울안개”, 무심하던 “촛불”, “공포를 기다리는 흰 종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은 이생의 부질없는 열망을 표상한다. 열망을 뒤로하고 “장님처럼 문을 잠그”는 일은 가장 애절한 이별 의식이었다.(「빈 집」)

그가 가장 머뭇거렸던 이별은 대학을 떠나는 일이었다. 지난 2004년, 79학번 재상봉 행사의 사회를 맡은 적이 있다. 그의 시 하나를 같이 읽었다. 「대학시절」이었다. 40대 중반이 돼 교정에 다시 돌아온 이들에게 기형도의 대학시절을 상기시켰다. 기형도는 요절했으나 당신들은 요절하기에 이미 늦어버렸다고 힐난하면서. 그러니 더 오래 살아 기형도를 기억하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는지 모른다. “버려진 책들이 가득”한 학교의 나무 의자들, “깊고 아름다웠”던 “은백양의 숲”이 기형도의 대학이었다. 그러나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숲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격동의 시대였다. 교수들조차 말을 잃었던 그 시대, 연희관 돌층계에 앉아 플라톤을 읽었다는 기형도의 시대 묘사는 장중하고 처절하기까지 하다. 최루탄 연기가 춤을 추듯 자욱한 교정에서 기형도는 아마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었을 것이다. 국가는 개인에게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 고민하면서 말이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고 기형도는 나지막이 외쳤다. 그가 끝내 이별을 선언하기 두려웠던 대학. 그가 머물고 싶어 했던 돌층계 옆에 그의 시비 하나 세우는 일조차 수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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