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시온 총무국장 (인예철학/언홍영·17)

나중에 밥 벌어 먹고살 직업으로 생각해 둔 것도 기자요, 1학년 1학기에 학보사에 몸담아 대학
생활 내내 한 번도 기자가 아닌 적이 없었지만 아직도 ‘소통’이란 두렵기만 하다.
 

일상적인 일이지만 사실 생각보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이란 훨씬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다. 말하긴 쉬워도 잘 말하긴 어렵고 잘 듣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의 청년들이 취업을 위해 취득하는 국가직무 능력표준(NCS)에도 의사소통은 중요한 능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더 먼 고대에도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와 같은 소피스트가 ‘실전! 말로 상대를 이기는 법’ 등의 처세술 수업으로 ‘스타강사’였음을 보면 더욱 명확하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정보를 취득하는 것은 생존과도 직결되는 만큼 의사소통에 대한 욕구는 사회적 인간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과거나 현재나 미래까지도 얼마나 ‘잘’ 소통할 것인가는 인간사회의 중요한 요소다. 이전 십계명을 쓴지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내 차례가 돌아왔느냐라는 푸념과 함께 이번에는 ‘소통’에 얘기해보고자 한다.

 

소통(疏通)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슬프게도 우리 주변에서 말했으나 제대로 전하지 못했고, 들었으나 알지 못 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언제나 한계를 동반한다. 소중한 사람과의 사소한 말다툼부터 시작해 대중들에게 내보이는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도 언어는 언제나 내 생각을 온전히 담지 못했다. 뱉은 말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왜곡되기도 했고, 기사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읽히기도 했다. 한국어 명사만 따져도 표준국어대사전 기준, 약 33만 3천 개가 넘는 단어가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로 ‘그것’을 단어로 표현해 전달하고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럴 때마다 사람들에게 텔레파시라도 보내서 의미를 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다. 텔레파시는 초능력이다. 완전한 소통이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에서 서로의 의사를 가감 없이 알아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언어로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나의 노란색과 당신의 노란색은 다르고 내 머릿속의 노란색과 언어의 노란색은 다르다. 인간들은 서로에게 틀린 답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서로 뜻이 통하는 일은 허무한 상상에 불과한 것일까?
 

실제로 소통을 위한 노력을 비웃듯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공감을 위한 대화도,그 이상의 침묵도 구겨져 여러 집단의 분쟁과 양극화로 점점 심화하는 모양새다. 여-야, 남-여, 기성세대-청년세대… 다양한 집단과 개개인 간의 불통이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물론 사람들이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 사람의 사고와 입장을 알 수 없기에 한계는 본질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의 틀린 질문과 답에 의해 상처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통을 시도한다. 대화하고자 한다. 얼마 전 EBS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밥친부터 시작’이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무속인과 종교인, 학부모 협회와 프로게이머,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 등 말 그대로 반대의 진영에 위치한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해 친구가 돼본다는 내용이다.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서로의 세계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완전한 소통은 아닐지라도 상대의 사고를 알아가면서 정보를 주고받는다. 이 작은 앎이 소통의 시작점이 된다. 결국 둘은 순간이나마 친구가 됐다. 소통의 첫걸음이란 이렇게 사소하면서도 기적적인 일이다.
 

죽을 때까지 인간들은 언어로 표현 불가능하다는 한계에 갇혀 의사소통에 장해를 받을 것이다. 텔레파시 자체는 초능력이다. 그러나 내 의견을 갈무리해서 표현하고 경청한다면 타인과도 조금 더 어우러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는 말이, 글이, 태도가 소통을 위한 작은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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