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완 교수 (우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법원은 주어진 사건에서 다퉈지는 주장 중에서 사실을 확정하고, 그 사실에 적용되는 법을 해석·적용하는 일을 한다. 사람이 언제까지 일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소송에서 쟁점이 되면 이는 사실판단의 문제로 법관이 자유재량에 따라 사실을 판단할 권한을 가진다.

대법원은 지난 2월 21일 전원합의체 판결로 이에 관한 문제에 대해 판단했다. 1989년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일반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또는 육체노동을 주로 생계 활동으로 하는 사람(아래 육체노동)의 가동 연한을 경험칙상 만 55세라고 본 기존 견해를 폐기하고 육체노동의 가동 연한을 만 60세로 봐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대법원은 이 판결의 견해를 이후 30년간 유지해 왔다.

그런데 그 30년 동안 대한민국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만 60세만 되면 오래 사셨다며 환갑잔치를 크게 열어 장수를 축하했으나, 요즘에는 그야말로 잊힌 ‘풍습’이 됐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조사에 의하면 국민 평균수명이 지난 2015년에는 남자 79.0세, 여자 85.2세로, 2017년에는 남자 79.7세, 여자 85.7세로 계속 늘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모든 국민이 기대수명 100세를 준비하는 시대가 됐다.

실제로 국민들이 일을 하는 기간도 늘어나고 있다. 법정 정년이 만 60세 또는 만 60세 이상으로 연장됐고, 실질 은퇴연령은 이보다 훨씬 높은 남성 72.0세, 여성 72.2세로 조사됐다. 현실은 거의 70세까지 일을 하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러한 노동 현장의 현실을 뒤늦게나마 법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은 그 성격상 현실을 앞서 나가기보다 변화된 현실을 뒤늦게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대법원은 1970년대까지는 복사기를 사용해 만든 문서인 ‘복사문서’에 대해 문서위조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가, 1980년 후반에 가서야 문서위조죄를 인정했다. 그동안 복사기가 많이 보급돼 복사문서를 이용한 범죄를 처벌해야 했기 때문이다. 1990년까지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생물학적인 성별 관념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20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법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바로 법과 현실 사이의 차이(gap)를 인식하고 이를 적시에 메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소송에는 늘 대립하는 당사자가 있다. 사람의 가동 연한을 늘리는 문제가 별거냐 싶지만 실제로 이로 인해 크게 손해를 보는 집단도 있다. 가령 보험회사의 경우 가동연한이 늘어나면 배상해야 할 일실손해액이 늘어나기 때문에 지급해야 할 보험금이 늘어나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보험회사로서는 되도록 가동 연한이늘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기존의 질서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기 때문에 새롭게 무언가를 바꾼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이번 판결은 기존의 법리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수정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판결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자유주의 법 체제를 유지하는데 있어, 법원의 공정성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최근 우리 법원은 이러한 공정성이 크게 훼손되는 위기를 겪고 있고, 이는 단지 법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질서 전체의 문제이다. 앞으로 법원이 할 일은 국민의 권리, 자유, 인권을 보호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판결을 통해 그동안 훼손되었던 가치를 조금씩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판결도 그 궤도 선상에 놓여 있는 것 같아 반가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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