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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썰] 달콤한 핑계와 쓰디 쓴 한 잔, 우리 소주 한 잔 어때?소주를 만나고 사람에 취하다
  • 김현지 기자
  • 승인 2019.03.04 00:57
  • 호수 47
  • 댓글 0

이러다 나, 오늘 정말 울겠다. 자꾸만 채워지는 소주잔을 보며 문득 든 생각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미성년자 딱지를 떼고 스무 살이 되어 처음 온 대학 술자리였다.

“난 소주 안 먹을래.”

말을 뱉자마자 또 거짓말한다며 술집 가득 야유가 쏟아졌다. 격한 반응에 하는 수 없이 한 잔 한 잔 들이킨 게 시작이었을까. 소주는 이제 막 청소년 딱지를 뗀 내게 ‘이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지?’ 싶은 쓰디쓴 맛의 투명한 액체, 그뿐이었다. 사약 먹듯이 울상지으며 쭉쭉 들이키다가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 게 새벽 2시 즈음이었나. 다음날 아침 내게 남은 것은 딱딱한 바닥에서 잔 탓에 잔뜩 배긴 등과 한가득 업데이트된 전화번호부, 이 둘 뿐이었다. 신기한 것은 서로 어색하기 그지없던 사람들이 같이 소주 한 잔 걸쳤다고 한 명 한 명 편해졌다는 것. 그때 소주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은 나는 깨달았다. ‘소주 한 잔’에 어떤 마법이 있는지.

그날 밤 이후로 나의 ‘소주 메이트’들은 내게 유달리 특별한 존재로 각인되었다. 어색한 만남이 물밀 듯 밀려오는 대학생활에서 “나중에 소주 한 잔 해요”라는 말이 꽤 유용하단 것도 알게 됐다. “소주 한 잔”이라는 수더분해보이는 제안이 친해지자는, 내지는 할 말이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단 것까지. 소주란 결국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 성격 좋은 척 둘러대는 달콤한 핑계였다.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신세타령을 하게 하고, 부끄럼을 잊고 사랑 고백을 하게 하고, 모두를 10년지기 친구로 만드는 ‘마법’이 소주에 있기에.

소주의 마법은 우리나라 영화 속에서도 등장한다. 영화 『내부자들』 속 장훈과 상구가 먹는 소주가 그 예시다. 『내부자들』은 함께 먹고 마시는 장면만으로도 줄거리를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식사 장면이 많다. 사람들 간의 식사자리는 누군가에게 비밀스런 약속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출세를 보장해주는 은밀한 제안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검사 장훈은 누군가와 겸상을 할 때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런 그가 먼저 겸상을 제안하고 허락한 자는, 다름 아닌 복수를 꿈꾸는 정치깡패 출신 상구였다.

“야 깡패야, 우리 아들은 그런 나라에서 살아야 되지 않겠냐?”
“허벌나게 정의롭구만.”

그들은 소주병을 평상에 두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담보로 거래를 시작한다. 복수와 정의라는 생경한 조합이 협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 소주는 여러 번 등장한다. 술자리를 거듭할수록 그들은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걷어나간다.

모텔에서 혼자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마시던 상구는 처음 만난 장훈을 경계하며 그의 요구를 모른 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둘이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인 자리에선 장훈이 그토록 원하던 비자금 파일을 건넨다. 소주의 힘을 빌린 탓일까.

이 둘만 봐도 소주잔을 부딪히는 것엔 분명 마법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정의와 복수가 공존하는 거사를 이뤄낸 것이 의리 때문인지 각자의 독한 심지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이유야 어찌 됐건 그들은 끝까지 서로의 편이었다. 그 묘한 우정은 아무래도 소주잔을 기울이던 그 작은 평상에서 시작된 것일 테다.

기자는 글을 쓰다 두연 찾아오는 소주 생각에 연희동의 ‘광’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소주란 액체는 신기한 것이, 때에 따라 단 맛이 강하기도 하고 쓴 맛이 강하기도 하다. 그 날의 소주는 약간 찬 감촉으로 달달하게 혀를 속이다가 끝에 가선 야속하리만큼 씁쓸한 맛이 되는 게 은근히 매력이 있었다. 한 잔 한 잔 마시다 보면 뜨거운 열기가 속에서부터 달아오르는 느낌. 소주가 주는 열기는 내면의 벽과 부끄러움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그래서일까. 원래 소주는 전시(戰時)에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군대 보급품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몽골과 전쟁을 하던 시기에 소주 증류법을 접했다. 소주의 명산지로 유명한 안동, 진도, 제주는 몽골군의 주둔지였거나 몽골과의 전투지역이었다. 증류 방법이 정교하고 들어가는 곡식의 양이 많았기에 원래는 일반 서민들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양반만 마시는 귀하고 고급스러운 술이었다.

그러나 지난 1965년에 양곡 관리법이 공표되며 쌀을 사용해서 술을 제조하는 것이 금지됐다. 그러자 증류식 소주의 명맥은 끊겼고, 희석식 소주의 시대가 열렸다. 곡식을 담가 만드는 증류주와 달리, 희석식 소주란 알코올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넣어 묽게 희석한 술이다. 희석식 소주는 기존 소주보다 제조과정이 훨씬 간단하기에 이 시기를 기점으로 소주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때 회사들이 다양한 소비층을 공략할 수 있도록 소주의 도수를 낮추기 시작해, 지금의 대중적인 소주가 된 것이다. 트리비아를 더하자면, 소주병의 이미지가 초록색으로 굳어진 것도 기존의 독한 이미지의 소주에서 벗어나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얻으려는 ‘그린 소주’ 회사의 마케팅 전략의 결과라고.

그 날 연희동에서 맛본 소주는 오랜 시간 동안 상대방과 깊은 대화를 하게 만들었다. 상구와 장훈이 이뤄낸 협의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소주의 힘은 유효했다. 초록빛 병과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대화로 서로에게 어떤 믿음과 위로를 주기에 충분했던 밤이었다.

이렇게 헛헛한 삶의 한편에서 서민주를 자처해온 소주는 우리나라 알코올 소비량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서민의 벗’이라 불리는 것들이 대개 그렇듯, 소주와의 우정이 마냥 밝고 감동스러운 것은 아니다. 맨정신으로는 누군가를 믿고 다가가기 힘든 세상 속에서 소주의 힘을 빌려 누군가에게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싶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달콤한 핑계와 쓰디쓴 한 잔.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씁쓸한 소주의 맛과 한국 사람들의 서툰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글 김현지 기자
hjkorea0508@yonsei.ac.kr

사진 최능모 기자
phil413@yonsei.ac.kr

김현지 기자  hjkorea0508@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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