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복동 열사를 떠나보내며

#14살

유난히 긴 설 연휴였다. 할머니께선 자꾸만 전을 집어먹는 나를 꾸짖으셨고, 나는 그런 할머니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 시간을 보냈다. 예전보다 훨씬 더뎌진 할머니의 전 부치는 속도에 내심 ‘할머니도 늙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포탈에서 우연히 보게 된 사진 속 인물은 정말이지 우리 할머니와 똑 닮아있었다. 1940년대 즈음, 우리 할머니 또래인 것 같은 소녀의 흑백사진. 그리고 그 옆에 쓰인 짧은 회고록까지.

 

“경남 양산. 1941년. 나는 양산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관두고 그냥 집안일을 도왔다. 그해 봄가을 즈음 우리 동네 반장과 누런 옷을 입은 일본 사람이 함께 우리 집에 왔다. 나를 군복 만드는 공장에 보내는 게 어떻냐고. 시집 보낸다고 고향에서 연락이 오면, 바로 다시 보내줄 테니까. 돈을 벌고 싶다면 더 일해도 되고, 어느 쪽도 괜찮다 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실랑이 끝에, 나는 결국 떠났다. 잠을 깨보니 대만이었다.”

 

그 뒤로 하루에 15명, 주말엔 50명까지 상대했다는 한 소녀의 이야기. 눈이 많이 내리던, 김복동 열사가 열네 살이 되던 해의 이야기였다.

 

#10억 엔 그리고 100만 원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2019년 1월 28일. 김복동 열사는 영원히 잠에 들었다. 이 세상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고발한 사람. ‘위안부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가 되기까지, 여든 해 동안은 일본말을 듣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곤 했다. 목젖 밖으로 흐를 듯한 설움을 눌러가며 수많은 계절을 보낸 그는 지난 1992년 긴 침묵을 깼다. 하지만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낸 상처는 돌고 돌아 ‘일본군 위안부 합의’라는 벽에 부딪혔다.

 

10억엔. 약 102억 원.
지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뒤 아베 총리가 내놓은 돈.

 

이후 일본은 합의 1년을 맞아 설치된 소녀상을 두고 ‘일본은 10억 엔이나 냈으니 이젠 한국이 좀 성의를 보이라’는 말로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돈으로 문제를 끝냈다고 믿는 뻔뻔함의 투영이었다.

한편 어떤 돈은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용기의 투영이었다.

 

100만 원.
일본 대지진 당시 김 열사가 피해자 돕기 운동에 건넨 돈.

 

김 열사는 세상에 오래 묵은 환부를 열어 보였다. 그 돈은 원망할 법한 대상에 보낸 서투른 애정, 또 한편으론 끈질긴 기다림과 소망이었다. 그러나 김 열사는 평생의 소원이던 사과,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떠나기 직전 “일본 진짜 너무하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물기 어린 단말마만을 남긴 채. 위로금은 위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돈은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바꾸는 힘은 없으니까.

 

#23명

김복동 열사의 별세, 이로써 ‘위안부’ 생존자는 스물세 명만이 남았다. 평균 나이 91세. 우리가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누구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상대하는 건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하지만, 달걀에게는 끈질긴 생명력과 끈기가 있다.

유난히 긴 설 연휴였다. 추운 날씨와 애틋하게 어울리는, 전을 부치는 우리 할머니 머리에 희끗하게 쌓여가는 눈을 보며 생각했다. 시간은 흐른다. 흐르고 흘러 우리 할머니는 소녀에서 머리가 희게 센 노인이 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23명의 시간은 소녀였던 그 시절에 멈춰있다. 그들이 나비가 되기 전에, 그 소녀들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그런 위로를 선물할 수 있을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 김현지 기자
hjkorea0508@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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