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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토불이] 일본군 '위안부', 단 한 명만이 남는 그 날에『한 명』을 통해 바라본 그녀들의 용기
  • 채윤영 기자, 양하림 기자
  • 승인 2019.03.04 01:18
  • 호수 1825
  • 댓글 0

먼지와 실오라기, 살비듬, 은빛 머리카락들을 손바닥 아래로 모아 뭉치던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여기 한 명이 더 살아있다…….”

-『한 명』 中

▶▶대구 2·28기념 중앙공원 앞에 위치한, 하얀 목도리를 두른 소녀상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피해자, ‘그녀’가 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차마 알리지 못한 ‘그녀’는 TV를 통해 마지막 한 명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중얼거린다. 여기 한 명이 더 살아있다고.

대구에서 만주까지

▶▶칠성시장 앞에 위치한 얕은 강. 마치 ‘그녀’가 다슬기를 잡고 있었을 것만 같다.

그녀는 잠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잠든 새 다슬기들이 손가락 새새로 달아나버릴까봐.
막연했지만 다슬기들이 자신을 고향 마을 강가로 데려다 놓으리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다슬기들이 말라 죽을까봐, 손가락으로 침을 찍어 발라주었다.

열세 살이었던 ‘그녀’는 고향 마을 강에서 다슬기를 잡다 끌려갔다. 사내들에 의해 트럭으로 던져진 ‘그녀’가 도착한 곳은 대구역이었다. 10리 밖도 모르고 살던 ‘그녀’는 역사(驛舍)의 기세에 눌렸다. 소녀들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떠밀리지 않기 위해 서로 손을 붙잡았다. 생판 모르는 군인들은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의지할 데라고는 손에 쥐어진 다슬기뿐이었다.

기자는 ‘그녀’의 발자취를 좇아 대구로 향했다. 다슬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 때쯤 대구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열차 안에 울렸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대구역은 소설 속 모습 그대로였다. 커다란 역사 속,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 갈 길을 아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 속에서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큰 아픔으로 기억되는 대구역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간호사 시켜준다고 해서 간다.”
붉은 양단 저고리에 석탄처럼 시커먼 깡동치마를 입은 소녀가 말했다.
“나는 옷 만드는 공장에 가는데.”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소녀가 말했다.

‘그녀’가 기차 안에서 만난 소녀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같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대다수의 조선 여성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돈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 땡볕에서 나물을 캐야 했다.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이 일자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일본 군인과 한국인 브로커는 이를 악용했다. 소녀들은 따라오기만 하면 공장에 취업시켜주겠다,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기차에 올랐다. 공장으로 가는 줄로만 알았던 이들이 도착한 곳은 만주 위안소였다.

‘위안’을 강요당한 소녀들

대구역에서 나와 시장길을 지나니 오른쪽에 공원이 보였다. 공원 맞은편에는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 자리했다. 건물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자 조그마한 전시실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 아래는 피해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채워져 있었다.

처음 자신의 몸에 다녀간 일본 장교에게 그녀는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잘못했어요…….”
...(중략)...
소녀들은 자신의 비명 소리를 따라 돌림노래처럼 이어지는 비명 소리들을 들었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돌림노래였다.

취업사기와 인신매매 등으로 전쟁에 동원된 여성들은 약 2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하루에 30명이 넘는 군인을 받아야 했다. 일반병사부터 장교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군인들이 15분 간격으로 다녀갔다. 수많은 군인들을 상대하던 이들의 성기는 뒤집어졌다. 고름이 생기고 피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군인을 받을 때는 ‘삿쿠’라는 콘돔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는 충분히 공급되지 않았고, 여성들은 한 번 사용했던 삿쿠를 빨아서 재사용해야 했다. 삿쿠가 찢어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몇몇 군인들은 삿쿠를 쓰지 않겠다며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자신에게 성병이 있다고 말했음에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성병이 무슨 상관이냐며 끝까지 삿쿠를 사용하지 않기도 했다. 임신을 반복했던 여성들은 자궁을 들어내야 했다. 여성들은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과 담배, 술에 의존했다. 당시 이들은 10대 초중반의 나이였다.

전시실을 모두 둘러본 뒤에는 영상관으로 향했다. 영상관에서는 ‘역사의 증언-6인의 기록’이라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맞이한 ‘그녀’의 친구 ‘분선’은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이처럼 반가웠다.

영상 속에서 ‘분선’은 위안소가 무서워 숨어버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고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위안소에 있을 때 자주 부르던 노래라고 말했다. ‘분선’은 노래가 끝나자 멋쩍게 웃어 보였다. 1분이 지나고 영상이 끝났지만 기자는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다시 ‘분선’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에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색색의 포스트잇들이 붙어있다.


광복이 해결해주지 못한 것

고향집에 돌아가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었다.
실공장에 있었다고 해야 하나? 비단공장에 있었다고? 아니면 그냥 좋은 공장에.

‘그녀’는 1945년이 돼서야 위안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일을 당하고 고향에 돌아가면 무슨 소용이냐며 한탄하곤 했지만, 머릿속에는 대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가 대구로 돌아가는 데는 무려 12년이 걸렸다. 위안소에서 7년, 도망쳐 나와 5년. 12년이 흘러 마주한 대구는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토록 보고 싶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녀’를 맞아주는 가족은 없었다.

기자는 ‘그녀’가 만주로 끌려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고향의 모습을 찾으려 칠성시장역으로 향했다. 시장 앞에 위치한 강은 바닥의 돌멩이가 다 보일 정도로 얕았다. 강둑으로 내려가 보니 열세 살 ‘그녀’가 다슬기를 잡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고향에, 12년이 걸려 돌아온 고향에 기자는 너무나 쉽게 서 있었다.

나라는 해방됐지만, 이들은 해방되지 못했다. 수치심과 죄의식은 위안소 밖에서도 이들을 옥좼다. 상처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은 아픔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누가 살아 돌아왔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우연히 소녀들을 마주칠까 두려웠다. 혹여나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누가 자신을 쳐다보면 골목으로 숨어버렸다. 그렇게 반세기가 넘도록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참말로 내가 깨끗한 우리 어머니 몸에서 태어났지만, 거기 갔다 와 몸이 상했는데 어떻게 결혼을 해. 남 신세 망치려고 결혼을 해? 결혼을 하려면 감쪽같이 속이고 해야 하는데
그 짓을 어떻게 해……. 그게 워낙 지독한 병이라서, 고쳤는데도 봄가을이면 근지럽고 그래.”

이들에게 결혼은 거리가 먼 얘기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순결’은 필수였다. 의지와 관계없이, 몇 년 동안 하루에 수십 명의 남자와 관계를 했다는 사실은 손가락질당할 일이었다. 위안소에서 걸린 성병으로 임신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녀’는 부엌에서 쌀을 씻다가도 빨래를 하다가도 황급히 화장실에 가 피가 날 정도로 성기를 긁었다. 피해자들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성병은 이들의 평범한 삶을 방해했다. ‘순결’에서 배제된 이들은 결혼에서도 배제돼 가정조차 꾸릴 수 없었다.

그 시절의 #MeToo
부족했던 #WithYou

김학순…… 그 여자가 어느 날 저녁에 티브이에 나와 막 울었다. 밥을 먹던 그녀도
밥알을 입에 문 채 울었다. 그 여자가 우는 것을 보니까 덩달아 그렇게 눈물이 났다.
그녀는 날짜도 잊히지 않는다. 1991년 8월 14일이었다.

광복 이후 약 50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이는 지난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공개 증언을 하며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히며 오랜 침묵을 깼다. 국내 거주자로서는 최초였다. 이후 신고자는 하나둘 늘어났고, 대한민국에서는 총 240여 명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신고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점점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김복동 할머니가 별세했다. 현재는 알려진 피해자가 22명밖에 남지 않았다. 위안부에 동원됐던 20만여 명 중 2만 명이 살아 돌아왔고, 2만 명 중 240여 명이 신고했으며, 그 중 22명이 남았다. 피해자 중에는 ‘그녀’처럼 자신이 위안부라고 끝까지 말을 꺼내지 못한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용기를 바탕으로 한 이들의 고백에는 비난 또한 뒤따랐다. 누군가는 말의 앞뒤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며 의심했다. 위안부 신고를 하겠다고 찾아온 피해자들에게 자신이 몇 명의 군인들을 받았는지, 피해를 어떻게 입었는지 상세히 서술하라고 요구했다. 4시간에 걸쳐 심문하며 그들의 아픔을 상기시킨다. 이에 할머니들은 대답한다.

‘모든 걸 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했으면 오늘날까지 살지 못했으리라’고.

-길원옥 할머니 증언록

‘그녀’의 이름은 ‘풍길’이다.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다 끌려간 이후로 ‘풍길’이라는 사람은 사라졌다. 그저 한 명의 위안부 피해자만이 남았을 뿐이다. 소설 마지막에 ‘풍길’은 결심한다. 마지막 피해자를 만나러 가겠다고. 혼자만 남는 게 무서웠던 걸까. 아니면 이 세상에 피해자가 당신 혼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한 가지는 명확하다. 한 명이라도 살아있는 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풍길’의 이름은 ‘그녀’다. ‘풍길’은 사라져도 위안부 피해자 ‘그녀’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글 채윤영 기자
hae_reporter@yonsei.ac.kr

사진 양하림 기자
dakharim0129@yonsei.ac.kr

채윤영 기자, 양하림 기자  hae_reporter@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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