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기자의 노메이크업 체험기>

 

1일차 : 예기치 못하게 친구 집에서 자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메이크업 없이 하루를 시작하게 됐다. 화장 없인 외출을 못할 정도로 화장에 의존적이진 않지만 확실히 주위 시선이 의식되긴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폭발적이지 않았다. 민낯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화장 안했네?’ 정도의 질문만 받았다. 내가 괜히 과하게 움츠러든 게 아닐까. 

 

2일차 : 금요일. 출근 날이다. 수습기자들에게 내 스스로를 소개해야하는 날이기도 하다. 왜 하필이면 오늘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민낯을 보여주는 것과 새로운 관계를 민낯으로 시작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 앞에 나가서 마이크를 잡고 소개를 할 때 친구들이 사진을 찍는 것도 부담스럽다. 화장기 없는 내 모습이 영구적으로 남는 게 싫다.  

 

4일차 :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기에 우리는 서로의 민낯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만나자마자 장난스럽게 친구가 건넨 말은 ‘날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였다. 물론 그 말은 웃어넘겼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날 때의 ‘성의’에 화장이 포함돼있었다는 것이 씁쓸했다.

 

6일차 : 더 이상 거울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민낯이 익숙해지니 차츰 노메이크업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무엇보다 편하다. 외출 준비 시간이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얼굴이 가려울 때 시원하게 긁을 수 있다. 피곤에 쩔어 집에 들어와도 화장을 지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지만 내 민낯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점점 편해진다. 

 

7일차 : 마지막 날이다. 피부가 좋아진 게 느껴진다. 뾰루지들이 거의 없어졌다. 그리고 여러 다른 변화들도 찾아왔다. 처음엔 화장을 안했기에 머리나 옷에 신경을 더 썼다. 그러나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 외향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머지 부분에서도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화장을 할 수 있는 내일이 기다려지는 것도 맞다. 조금은 더 또렷하고 알록달록한 얼굴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건 여전한 것 같다.

 

<현지기자의 노브래지어 체험기>

 

1일차 : 나는 집에 오자마자 벗어던지는 최악의 삼형제가 있다. 그 중 브래지어는 단연 메인 멤버(나머지 형제는 렌즈, 양말 등). 평소에도 답답한 걸 싫어해서 최대한 크게 입고 후크도 맨 끝에 채운다. 이런 나인데도, 지금 너무 이상하고 찜찜하다. 혹시 누가 보는 건 아닐까. 나도 기지개 켜고 싶다…

 

2일차 :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다. 오늘은 중요한 발표가 있던 날. 동기가 발표하는 내 모습을 찍어 보내줬다. 나는 '노브라'로 발표를 했단 생각에 가슴 밖에 안 보이는데, 언니는 사진을 찍었으면서도 내가 노브라라는 걸 정녕 모르나보다. 카톡 창엔 신난 듯한 메시지들과 괴상한 이모티콘의 향연뿐이었다.

 

3일차 : 이제 좀 적응을 하니 진짜 편하긴 하다. 늘 브래지어의 압박과 함께 '나 여깄어!'를 외치던 가슴이 얌전해졌달까. 그래서 이제 남들을 신경쓰기보단 편함과 땀이 안 찬다는 점을 즐기기로 했다. 익숙해지니 여유도 좀 생긴 것 같다. 술자리에서 취한 친구가 내가 속옷을 입지 않은 걸 알아채고 “거의 미국인이네~”라며 조롱했다. 거기에 대고 “진짜 미국 보여줘?”라며 장난칠 수 있는 여유, 이 정도?

 

4일차 : 여유 같은 소리 한다. 목요일 춤 수업에선 공을 등에 끼고 누워 스트레칭을 한다. 죽고 싶었다. 해탈한 얼굴로 수업을 듣다 그냥 친구들한테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아 진짜?”, “그러네”하는 정도. 어쩌면 다들 괜찮은데, 나만 괜히 겁냈던 건가 싶었다.

 

6일차 : 오늘은 학술제라고 나름 오피셜한 착장인 컴퓨터 사인펜 룩(검은 하의에 흰 셔츠)으로 집을 나섰다. 공식적 착장에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게 걱정될 법도 했으나 남들은 물론 이젠 나 스스로도 ‘노브라’에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서서히 브래지어 없이도 온전해져 가는 듯하다.

 

7일차 : 내일부터 다시 차야 한다니, 사실 좀 귀찮다. 친구들이 체험기 종료를 축하한다며 ‘안 조이는 볼륨업 속옷’을 공구하자고 한다. 역시 아무래도 세상은 아직 브래지어를 벗어던지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언제부터 ‘브래지어 해보기’가 아닌 ‘노브라 해보기’를 체험해봐야 했는지 궁금해졌다. 

 

연세대학교 인문대학원 HK연구원 정승화 교수에게 묻다. 

 

Q. 여성들이 꾸밈노동과 브래지어 착용을 그만둘 권리를 외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외모가꾸기는 개인적인 만족이나 미적 체험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과도한 시간과 돈, 노력을 들여서 수행하는 고단한 노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외모에 대한 평가가 일상이 된 나머지, 여성들은 화장 없이 외출을 할 때 마스크를 낄 정도로 강박을 느끼게 된 것이죠,

브래지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브래지어는 여성의 가슴을 감싸는 속옷으로, 남성들은 입지 않았습니다. 성적 차이를 가리는 것을 사회적 매너로 생각했기에 여성의 유방을 가리는 관습이 만들어진 셈이죠. 브래지어를 하는 것이 여성의 가슴이 처지는 것을 방지한다고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몸의 라인을 추하게 여기고, 고정된 미의 틀에 여성을 구속시키는 문화적 관습입니다. 이를 장시간 착용하면 몸을 조여서 건강에도 해롭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몸의 주인임을 선언하는, 일명 ‘탈코르셋’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미에 대한 추구와 강박은 자신의 기호나 선택이 아닌 강요된 구속이란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Q. 탈코르셋 운동과 사회적 동향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외모지상주의적 문화에 비판적으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은 본능의 차원에도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더욱이 주체적인 미적 기준을 가지고 건강과 자신감, 개성이 모두 표현될 수 있는 방향이면 좋겠죠. 외모나 패션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다양한 여성성과 남성성이 수용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현재 외모가꾸기는 지나치게 소비 지향적이고 인위적이며, 성별 간 차이를 극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코르셋 운동이 남성과 비슷해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남성과 같아지려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편하고 실용적인 의복과 외양은 여성이건 남성이건 상관없이 누구든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자, 여자이기 전에 다른 실천과 수행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니까요.

 

글 김현지 기자
hjkorea0508@yonsei.ac.kr
연세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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