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평화는 비싸다고 한다. 피 흘리지 않은 평화는 없다고도 한다. 인류 전쟁사를 들여다보면 그만큼 어려운 것이 평화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최근 세계 70여 정상들이 파리에 모여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기념했다. 그 유럽 대전으로 유럽은 4천만 명에 가까운 목숨을 잃었다. 중형 국가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그 참극에도 깨닫지 못한 유럽은 다시 대전을 겪었다. 5천만 명에 이르는 목숨이 사라졌다. 두 번의 살육 속에서 유럽은 평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유럽연합(EU)이라는 실험을 진행했다. EU 출범 이후 70여 년 동안 EU 회원국들은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막대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쟁 대신 공통의 제도를 만들어가며 평화와 번영을 향해 전진했다. 이번 기념식에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국가주의를 그 전쟁의 배후로 지목했다. 자국 이기주의가 어떻게 이웃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지 수치스러운 전쟁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행사를 지켜보며 동아시아를 생각한다. 동아시아는 트럼프와 시진핑의 무역전쟁으로 대표되는 자국 이기주의, 한·미와 북한의 첨예한 군사적 대립,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일관계 등을 핵심으로 하는 세계전쟁의 잠재 상황에 부닥쳐 있다.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 각국의 군사력이 눈에 띄게 증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평화를 향한 노력은 정치적 입장을 떠나 귀중하다. 평화가 없으면 정치적 입장은 존재할 수도 없다. 사실상 EU의 제도적 기능을 이 정부의 행보가 감당하려 하는 것이다. 역부족인 도전들이 이어지지만, 이 행보가 건실하게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곧 평화를 위한 기원이다.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에서 남북한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잃었고 천만에 달하는 가족이 헤어졌다. 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다시 전쟁한다면 한민족 전체의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른다.

유럽은 종전 100주년을 기념하며 각오를 다졌다. 우리는 종전을 향해 각오를 다져야 할 때다. 유럽과 한반도에서 타오르는 평화를 향한 각오들이 전쟁들에 희생당한 영혼들을 위로하길 빈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