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시온 보도부장 (인예철학/언홍영·17)

요즘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대충 살자’ 시리즈가 유행이다. “대충 살자. aa해도 bb하는 cc처럼”라는 형식의 이 유행어는 ‘양쪽 양말이 달라도 색깔만 같으면 신는다’라거나 ‘비닐하우스 위에서 자는 고양이처럼’이라는 식으로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일들에 적당주의를 섞는 것인데 이 시리즈는 사람들을 피식하게 만든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적당하게 살아가는 여유의 묘미’인 것이다.

이러한 ‘대충 살자’ 시리즈는 현실을 유쾌하게 찌른다. ‘미니멀 라이프’부터 시작해 ‘소확행’과 같이 작은 것들이나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관심들이 커지고 있다. 장래희망도 대통령이나 우주비행사보다는 공무원이나 선생님과 같이 비교적 안정성이 보장된 직업들이 선호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손에 잡기 힘든 것들에서 눈을 돌려 당장 내 손 안에 있는 것들에 감사하며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요즘 서점에 가보면 위로와 쉬어감, 힐링에 대한 책들이 즐비해 있다.

처음에는 이 말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생각했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어디 있냐고 말이다. 바쁘게 살아가며 자신의 능력을 펼치는 사람들은 나에게 있어 반짝이는 사람이었고,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었다. 성실은 재능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하나의 미덕으로 간주했다. 이에 최선을 다해 살지 못하는 나를 재능이 없다고 질책했고, 한편으로는 속상한 마음을 계속해서 갖고 살아가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난 계기가 바로 학보사 활동이다. 모두 당연하게 했던 수능 공부와 달리, 기자 생활은 처음으로 내가 선택해서 짊어진 온전한 나의 책무였다. 이 때문인지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했으며, 의욕은 넘쳤다. 그러나 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주변을 탓하기도 했다.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 못 미쳤다고 생각할 때는 자괴감에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항상 마음 한구석은 초조했고, 나는 언제나 평가의 대상이었으며, 편두통까지도 달고 살았다.

이에 방학 때는 부모님이 걱정하실 정도로 온종일 누워서 몇 시간씩 잠만 자기도 했다. 번 아웃이 온 것이다. 너무 많이 불태웠고, 결국 잿더미에 주저앉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부담감에 거절했던 장(長) 자리까지 맡으면서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밤잠을 설친 날도 많았다.

처음에 보도부장의 자리에 앉게 됐을 때 선임 부장이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가진 욕심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고. “네 계획대로 잘 진행되진 않는다”고. 당시에는 그런 말들을 잔인한 발언이라고 매도하고 왜 벌써 포기하느냐고 외면했었다. 하지만 진짜 실전에서 깨져보고 타인들과 부딪히면서 내가 가진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포기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포기했을 때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같은 ‘신(信)’을 쓰더라도 자신과 맹신은 다르다.

부장직을 맡으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본다는 것은 그저 높은 곳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일정 수준의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각자의 능력치를 분석하고 적절한 곳에 분배하는 것이었음을 배웠다. 한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아직도 나는 욕심이 많다. 잘하고 싶고 칭찬받는 것을 좋아한다. 어쩔 수 없지 내 성격인걸. 꼼꼼한 성격은 아니지만, 적당주의로만 살아가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는다. 대충 살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찔리고 겁나서 도저히 못 하겠다. 그러니까 ‘대충 살자’의 방점을 ‘대충’이 아니라 ‘살자’에 두고 열심히 살면서 관용을 살짝 얹어보고 싶다. 번 아웃에 빠져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 전에, 항상 초조한 감정 속에 지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이 정도면 됐다고 눈감아주며 살아가자. 그렇게 살아간다면 적당히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여유가 나에게도 생기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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