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전반의 권익을 위한 노조와 기업의 상생의 방향성에 관하여

금정훈 (철학·16)

어릴 적, 스쳐 간 이슈 중, 기업과 노동자 간의 갈등에 관해 기억나는 것이 있다. 바로 지난 2010년에 이슈가 됐던,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병 사태다. 당시 뉴스에서 ‘유독’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만 다수의 노동자에게 발병했음을 강조하면서 삼성 측에 잘못이 있다는 뉘앙스로 말한 것이 깊게 남았다. 당시 중학생에 불과했던 나는 ‘한국 대표 기업인 삼성이, 설마 기업을 위해 일해 온 노동자들이 아픈 것을 외면할까?’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으나, 며칠 전, 오는 23일에 공식적으로 사과 입장을 발표한다는 기사가 올라온 걸 봤다. 어린 시절 내 이상과는 다르게 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은 사과를 받기 위해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힘든 여정을 거쳐 온 것이다.

‘내 관점’에서 이해한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약자성에 침투하려는 기업의 행위를 저지함과 동시에,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자의 모임이란 결국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에서 노동자는 약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것이다. 삼성이 대표적인 무(無)노조 기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노동자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노조가 생길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것을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상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내게, 기업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형태든 법으로 강제한 형태든 모든 기업에서 필연적으로 정상적인 노사관계를 갖추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삼성처럼 제대로 된 노조가 만들어지기조차 어려운 환경도 있지만 ‘강성노조’에 골머리를 앓는 현대와 같은 기업들도 있다. 최근에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민주노총과 전교조 등이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는데 이처럼 노조 사이에도 큰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노조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 곳조차 있는데 어느 곳은 노조가 약자적 입장의 노조가 아닌 ‘강성노조’, 심하면 ‘귀족노조’라며 더는 기업과의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서지 않으니 그 이상의 책임을 다하라는 말을 듣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건강하지 못한 노조의 형태들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노조는 노동자의 최소한의 권익을 보호하고 나아가 권리를 증진하는 당연한 것을 보장하기 위한 모임이다. 문제는 이 당연함의 기준이 너무나도 모호하다는 점이다. 기업 입장과 노동자의 입장에서 ‘당연한 부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양 진영이 한 측의 기준에 일방적으로 맞추거나 맞추길 바라는 것은 사치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간의 소통으로 이 적정선을 찾아가야 한다.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에서 기업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을 지급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조는 기업에 적극적으로 스스로가 약자로 남지 않게 할 말은 할 수 있는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힘을 키우는 것을 과업으로 삼는다. 반대로 기업은 노동자와의 건강한 상생을 위한 눈높이 작업을 통해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건전한 협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해야만 노조와 적정선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업 이익의 허용 범위 이상의 손해를 입히면서까지 노동자의 이익을 요구하는 노조가 있다면 이들은 기업의 소통 의지를 막는 부정적 요소가 된다. 노조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레 노·사 양측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만약 노사관계가 오로지 해당 기업과 노조 간의 관계에 끝난다면 모르겠지만 한 기업의 노사관계는 다른 기업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국 여기서 파생되는 기업별 노조 사이의 불균형은 노동자 전반의 불균형으로 귀결된다. 쉽게 말해 상생이 아닌 불통의 이익 추구가 해답이 되지 못하며, 단순히 자신의 논리를 고집하는 것을 자제하지 않을 경우 다른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을 더욱더 힘든 상황에 놓이게 할 것이다. 따라서 필요 이상의 권리 요구를 자제해야만 장기적인 권익 보호를 성취할 수 있다.

나는 경제학도도 아니고 노조나 기업 나아가 노사관계를 깊게 공부하지 않아 심도 깊은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는 입장인지라 어느 측에서 더 양보하라는 등의 말을 하기가 꺼려진다. 그저 양 진영이 ‘각자의 권익을 지킨다’는 정당화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를 파멸적인 치킨게임으로 이어지지 않게 각자의 선을 지나치게 확장하지 않고 상생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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