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매거진부장 (철학/언홍영·16)

#1

일전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시답지 않게 생각했던, 어쩐지 곧 헤어질 것 같다던 남자친구와의 이별 이야기였다. 흔한 대학생 커플들의 연애와 이별이라 생각했다. 친구가 당해온 폭력을 듣기 전까지. 남자친구는 헤어지자는 친구에게 칼을 들고 찾아와 자살하겠노라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렇게 몇 주를 더 만나다 또다시 이별을 고한 며칠 뒤 새벽, 남자친구는 친구의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와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집에 있던 물건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졌다고 한다.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이 더없이 무서워 보였다 한다. 듣기만 해도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2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다. 정말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오랜 시간 만나왔고 각자의 나이도 나이인지라 몇 년 후에는 꼭 이 사람과 결혼 하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다짐은 실현되지 못했다. 생리 시기를 고려해 피임 했던 두 사람, 불안한 마음에 써 본 임신테스트기에는 선명한 두 줄이 나왔다. 이후 사랑을 마다하지 않던 남자친구는 연락이 끊겼고 다른 친구와 함께 산부인과에 가 불법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간신히 연락된 남자친구는 사과 대신 ‘창녀’라는 말을 하며 화를 냈다고. 사랑은 빠르게 식었고 사랑 끝에는 상처만 남았다.

#3

이번엔 내 얘기다. 약간은 결이 다를 수 있겠다. 주량을 모르던 신입생 시절, 술에 취하면 구석에서 잠을 자는 게 주사였다. 그리하여 술을 마신 다음 날이면 갖가지 우스운 사진이 남았었다. 왁자지껄했던 술자리가 끝나고, 하루는 한 친구가 술에 취한 내 사진을 보여주며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나라서. 우리라서 다행인 줄 알아. 아니었으면 저기서 자진 않았을걸.” 과민반응이라고? 글쎄. 그 친구는 ‘건드리지 않은 것’을 이야기했고 며칠 뒤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고백을 해왔다. 사진 속 내 모습이 멍청하고 무력해 보였다.

#4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멍청한 여자들에 대해 들어왔다. 위험한 남자들보다, 멍청한 여자들에 대한 경고를 더 많이 들어왔다.” 강화길 작가의 소설 『괜찮은 사람』 중에는 「호수-다른사람」이라는 단편 소설이 수록돼있다. 소설 속 민영은 호숫가에서 ‘괜찮은 사람’인 그녀의 애인에게 혼수상태가 되도록 폭행을 당한다. 의식을 잃기 전 민영이 남긴 마지막 말 “호수에 두고 왔어. 호수에.” 사랑을 잃은 호숫가에 그녀는 ‘괜찮은’ 애인 역시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5

데이트폭력. 어찌나 이질적인 두 단어의 조합인지. 지난해 발생한 데이트 폭력만 해도 1만 303건이란다. 2014년 6천675건에 비하면 거의 두 배 되는 수치다. 올해 초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에서는 20대부터 60대 여성 2천 명을 대상으로 데이트폭력 실태를 조사했다. 설문에 따르면 이들 중 88.5%가 데이트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십중팔구 겪고 있는 문제. 그럼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겪는 문젠데 해결은 어떻게 되고 있냐고? 같은 조사에서 거의 10명 중 6명, 58.7%가 꼽은 데이트 폭력 원인은 가해자에 대한 미약한 처벌이다.

“원래 남녀상열지사가 제일 재밌는 거야.” 빡빡하기만 했던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소소한 낙으로 남자친구 이야기를 해주셨던 국어 선생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지난달 30일,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은 데이트 폭력 등 관계집착 폭력행위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했다. 일명 데이트폭력방지법으로 불리는 위 법안은 발의된 지 1년이 넘었으나 아직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방지와 처벌을 비롯한 대처 방안이 하루빨리 마련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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