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점자표기에 시각장애인은 속수무책 울룩불룩 점자 없는 평평한 우리 사회 점자, 효율성에 가려진 권리

우리나라에는 한글이 아닌 ‘또 다른 공용어’가 있다. 바로 ‘훈맹정음’으로도 불리는 한글 점자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시각장애인은 지난 2017년 기준 약 25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점자표기가 이뤄진 곳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나마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찾을 수 없는 점자
권리를 지키는 길은 험난하기만

 


「점자법」은 점자를 ‘한글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문자이며 일반 활자와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고 명시한다. 하지만 법령이 무색하게, 점자표기가 미흡한 분야는 한두 곳이 아니다. 식료품·생활용품은 물론이고 생명과 직결된 의약품에서조차 점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2017년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점자표기기초조사』에 의하면, 시각장애인들은 ▲냉방 및 제습기 ▲화장품류 ▲파스 및 밴드류 등 수십 가지 항목에서 점자 미표기로 인한 불편을 겪고 있다. 점자 확산 캠페인을 진행 중인 서울여대 ‘훈맹정음’팀의 홍윤주(디지털영상학과·15)씨는 “시각장애인과 함께 카페나 음식점에 가면 메뉴판에 점자표기가 없어 메뉴를 직접 읽어드린다”며 “필요한 곳에 점자가 표기되지 않은 경우는 너무나 흔하다”고 말했다.

점자 미표기로 인한 불편은 특히 용기 모양이 비슷한 제품에서 두드러진다. 점자표기가 없는 상품은 손끝에 의존한 채 모양만으로 구별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식품이다. 아무리 라면의 종류가 다양해도 시각장애인에게는 ‘어떤 즉석식품’일 뿐이다. 통조림, 과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많은 시각장애인들은 어림짐작으로 식품을 사고, 직접 먹어볼 때야 내용물을 인지한다. 일부 캔, 유리병 음료 등에 점자표기가 있지만 충분한 수준은 아니다. 구체적인 상품명이 아닌 ‘음료’ 또는 ‘탄산’ 정도로 표기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로서 보장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조차 침해받고 있는 셈이다. 1급 시각장애를 가진 세종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오윤진 교수는 “용기 모양이 같은 컵라면의 경우 물을 버려야 하는 제품인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알기 힘들다”고 전했다.

생활용품의 경우, 이들의 불편은 선택권 문제를 넘어 안전과 직결된다.『점자표기기초조사』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A씨는 “샘플의 경우 내용물이 샴푸인지, 로션인지, 색조화장품인지 전혀 알 수 없어 실수하기 쉽다”고 말했다. 헤어스프레이인 줄 알고 살충제를 뿌리거나 세제와 락스를 혼동할 수도 있다. 일상생활 속 흔한 물건들도 이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온다.

점자표기가 없는 의약품도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의약품 오용은 생명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점자표기가 시급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각장애인 소비자는 의약품의 세부정보는 물론 명칭조차 알기 어렵다. 현행법상 의약품에는 제품 명칭, 효능·효과, 용법·용량 등의 정보를 기재해야 한다. 그러나 점자표기는 권고사항에 불과하다. 지난 2017년 8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편의점·마트 등에서 구매할 수 있는 안전상비의약품 13개 품목 중 점자표기를 하는 것은 4개뿐이다. 심지어 이마저도 제품의 명칭에 그쳤다. 세부설명이 필수적인 의약품의 특성을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한 결과다.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의 점자표기율은 각각 0.2%와 0.3%에 불과했다. 오 교수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안전상비의약품 혹은 시각장애인이 자주 사용하는 안약, 안연고 등 비슷한 용기에 담긴 제품에 한해서라도 점자표기를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세상에 나오고 싶은 점자
권리 침해 방관하는 사회


이처럼 시각장애인들은 소비자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다.

지난 2017년 4월, 윤 의원이 의약품 관련 점자표기 확대를 골자로「약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1년 6개월가량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제약업계의 반발에 부딪힌 탓이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는 해당 법안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가격 상승이 이유였다. 

공정거래위원회 또한 2017년 11월 ‘의약품 내 점자표기 의무화’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제안했지만 좌절됐다. 이번에도 가격 상승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의약품관리과 김민수 주무관은 “공정거래위원회 또한 의견수렴을 거친 후 점자표기가 어려운 상황에 동의했다”며 “현재 점자표기 정책 변화 계획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점자표기가 미흡한 원인으로 가격 상승이 아닌 기업 내  인식 수준을 지적한다. 1급 시각장애를 가진 조선대 특수교육과 김영일 교수는 “이미 유럽에서는 점자표기가 보편화 돼있다”며 “비용이 아닌 기업의 인식과 사회적 책임 이행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민간기업의 경우 점자표기 의무도 없고 점자표기를 하지 않았을 때 불이익도 없다. 심지어 의약품과 달리 생활용품은 점자표기가 ‘권고사항’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점자표기에 선뜻 나서는 민간기업을 찾기 어렵다. 현행「점자법」이 더욱 구체화돼야 하는 이유다. 지난 2017년부터 시행 중인「점자법」은 점자 발전에 대한 장기적인 발전 방안만 명시할 뿐, 구체적인 지침은 담고 있지 않다. 김 교수는 “지금 상태에서 기업들에 자발적인 점자표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며 “법 개정을 통해 의무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유럽에선 의약품 명칭을 점자로 표기해야 한다. 또 시각장애인 단체가 요구할 시, 점자 및 확대문자를 활용한 대체 설명서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의 문자는 대체될 수 없다


일각에서는 음성 안내 서비스가 확대됨에 따라 점자의 필요성이 약해졌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지난 2014년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장애인실태조사』에서 시각장애인의 점자해독률은 약 5.1%에 그쳤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시각장애인연합회 김훈 연구원은 “점자가 필요하지 않은 경증 시각장애인까지 함께 조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4~6급 시각장애에 해당하는 경증 시각장애인 인구는 전체 시각장애인 25만 명 중 17만 명을 웃돈다. 실제로 같은 해 국립국어원에서 1~3급 시각장애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는 점자해독률이 42.6%로 나타났다. 김 연구원은 “점자는 시각장애인의 고유 문자”라며 “음성 안내 서비스가 보조 수단으로 기능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점자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 역시 “음성으로 정보를 듣는 것은 직접 점자로 정보를 읽는 것보다 정확성이 떨어진다”며 점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점자법」은 ‘시각장애인은 문자 수단으로서 점자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다. 점자는 시각장애인에게 배려가 아닌 권리다. 김 연구원은 “점자 확산의 노력은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권리 보장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라고 말했다. 오랜 기간 이들이 겪어온 권리 침해에 마침표가 필요한 때다.

 

 


*전문의약품은 구매 시 의사 처방전이 필요하며 일반의약품은 처방전 없이도 약사의 판단 또는 소비자의 의사에 따라 살 수 있다.

 

 


글 박윤주 기자 
padogachulseok@yonsei.ac.kr

사진 하광민 기자 
pangma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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