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은 공공재가 아니다

“2인치”

대부분의 낙태가 이루어지는 12주의 태아 크기다. 2인치는 5.08cm로 손가락 한 마디에 불과하다.

 

“24주”

강간으로 임신했을 때 자신이 성폭행 피해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주어진 기간이다. 피해자는 24주 내 가해자의 유죄 판결을 입증해야 한다. 만약 가해자가 죄를 부인해 기간이 길어진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뿐. 출산 혹은 불법 낙태.

 

“옷걸이”

소설 『덕혜옹주』에서 시녀 복순은 옷걸이를 이용해 낙태한다. 옷걸이는 예전부터 쓰이던 자가 낙태 기구다. 여성들은 옷걸이의 갈고리 부분을 질에 넣어 자가 낙태를 시도했다.

 

“1.1%”

현행법상 합법화된 낙태는 전체 낙태 건수의 1% 남짓에 불과했다. 나머지 99%는 마땅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 채로 낙태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낙태 후 몸에 이상이 생겨도 치료받지 않은 사람이 응답자의 70%가 넘었다. 35.3%는 낙태 뒤 전혀 혹은 충분히 쉬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범죄자”

지인이 낙태했다. 그의 남자친구는 펑펑 울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의 미안함과 낙태비용으로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지인은 범죄자가 됐다. 그녀는 아직도 우울증약을 먹는다. 평생 아픔을 안고 산다.

 

“저는 음지에서 수술받다 죽고 싶지 않아요.”

 

지난 8월 17일, 보건복지부는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낙태를 포함했다. 이어 낙태 수술을 집행한 의사는 자격을 1개월 정지하겠다고 밝혔다. 산부인과의사회는 낙태 수술을 전면으로 거부하겠다고 응했다. 여성의 몸을 두고 전쟁이 난 꼴이다. 그런데 낙태를 죄로 규정한다고, 과연 낙태가 어느 순간 뿅 하고 없어질까? 글쎄, 전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법적으로 낙태를 막든, 막지 않든 낙태를 결정하는 여성의 비율에는 별 차이가 없다. 미국은 지난 1973년 낙태를 합법화했지만, 합법화 전후의 낙태 건수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낙태는 꾸준히 일어난다. 보건복지부의 추정에 따르면 2010년에 낙태 수술을 받은 임산부는 16만 9천 명에 달한다. 1천 명 중 17명꼴로, OECD 35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배재대 실버보건학과 박명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선 해마다 50만 건의 낙태 수술이 이뤄진다. 보건복지부의 통계는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한 점. 지난해 합법적으로 진행된 낙태는 4452건에 불과하다는데, 수십 만 건의 수술들은 어느 수술대 위에서 이뤄진 것인가. 낙태죄는 원정 낙태를 증가시키고 낙태를 음성화했을 뿐, 낙태율을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낙태 불법화에도 줄어들지 않는 낙태율은 결국 음성화된 임신중절수술의 만연을 의미한다. 이로 인한 위험 부담은 오롯이 여성 개개인의 몫이다. 수술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부작용이나 감염을 겪어도 책임을 물을 곳이 없다. 세계적으로 매년 불법 낙태 때문에 사망하는 산모는 8만 명 이상이다. 낙태죄는 임신중단을 원하는 여성들의 정보권과 의료권을 부당하게 제한하고, 결과적으로 많은 여성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 지금도 인터넷 등지에서는 유산을 위해 남자친구에게 배를 맞거나 계단에서 굴렀다는 사례를 왕왕 볼 수 있다. 지금 낙태죄는 누구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가? 낙태는 살인이라는 주장 앞에서, 목숨을 건 선택으로 내몰리는 여성의 존재는 지워진다.

 

“나의 몸, 나의 선택”

 

낙태에 대한 사회의 논조에는 일관성이 부족하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하던’ 시대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산아제한정책을 폈다. 이른바 ‘낙태 버스’가 전국을 순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보단 둘, 둘보단 셋이 좋은’ 지금, 낙태는 죄다. 정부는 가임여성 지도를 만들고 집집마다 방문해 가임여성들을 조사했다. 출산율이 높을 땐 정부 주도하에 낙태를 조장하더니, 출산율이 낮아지니 새삼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꼴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가 여성의 몸을 출산 도구로 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과연 생명의 중요성이 몇 년간의 출산율 추이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낙태를 죄로 규정하는 법안이 정부의 인구 통제 수단에 불과하다는 증표다.

임신중단은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여성들의 기본권이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태아도 생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출산의 당사자인 여성들은 정작 이 논의에서 철저히 배제돼 있다. 착상한 지 6주 된 세포 덩어리가 산모의 생명보다 우선한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죽어나는 건 법의 지배를 받는 여성뿐이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에게 지극한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이들이 태어나면 어떤가? 우리 사회는 낳지 않을 권리는 차치하고, 낳아서 키울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고 있는가? 엄마와 아이를 기다리는 건 의료 환경 및 출산보조금, 양육보조금 등 사회복지정책의 부재다. 육아를 여성에게 떠넘기는 남성들, 정부의 형편없는 육아 정책, 그리고 엄마들을 ‘맘충’이라고 부르는 한국 사회다. 이런데 누가 아이를 낳고 싶어할까. 낙태죄는 아이의 '생명권'을 말하면서도 아이가 '사람답게 살 권리'는 말하지 않는다.

임신·출산 때문에 임금과 일자리 상의 불이익을 겪어야 하는 사회. 슈퍼맘 신화와 맘충 배격이 공존하는 사회. 정상가족 범주 밖에 있으면 소외받는 사회. 기회도 결과도 결코 평등하지 않은 사회. 낙태를 하고 싶어서 하는 여성은 없다. 한 건의 낙태 속에는 여성 개인의 선택을 넘어서는 복잡한 사회적 배경이 있는 셈이다. 여성의 일방적인 침묵과 희생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서 출생율이 바닥을 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출생은 곧 이 사회에서 출산한 여성으로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다는 의미다. 낙태죄라는 족쇄로 여성의 삶을 옭아매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뀔 수 없다.

 

“저는 임신 기계가 아닙니다.”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는 낙태죄는 폐지돼 마땅하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사회적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다.

임신중단은 살인이 아니며 범죄는 더더욱 아니다. 민법상 태아는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자연인’으로 인정받지 못해 법적 지위가 없다. 임산부를 폭행해 유산에 이르게 한 경우에도 가해자는 형법상 살인죄가 아닌 상해죄나 폭행죄로 처벌받는다. 법적 지위도 없고 생명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존재를 생명으로 규정하는 형법은 ‘낙태죄’를 규정하는 조항 말고는 없다.

그 법조문 어디에도 남성의 책임은 보이지 않는다. 낙태죄는 여성에게 임신중단의 모든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낙태 수술에는 남성의 동의가 필요하다. 자신은 법적으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여성의 삶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한다. 분명히 임신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다. 모순적이게도 낙태는 제도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여성만의 범죄이자 수치다.

결코 낳느냐 마느냐의 간단한 이분법적 문제가 아니다. 새로 태어날 생명과 여성에게는 평생에 걸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다. 낙태를 죄로 규정하는 것은 여성의 삶 전체를 통제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와 여성의 삶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태죄가 아니다. 진정한 성 평등, 성교육과 피임법 교육, 다양한 가족 형태의 인정, 양육 지원과 성 평등 노동 정책 등 근본적인 사회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근본적 고민 없이 여성의 결정권을 제한하는 방식은 터진 둑을 돌멩이 하나로 메우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낙태죄 앞에서 결국 여성들은 연애하지 않고, 섹스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도 낙태가 범죄라면, 그래서 여성들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면. 여성을 불법 낙태로 내모는 국가에게도 죄를 물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시키고 나 몰라라 하는 남성에게도 죄를 물어야 한다. 여성의 책임만을 묻는 낙태죄는 그 자체로 국가적 차별이고 폭력이다. 의료계와 국가의 힘겨루기에 가장 피해를 입는 이는 누구인가? 비도덕적인 것은 누구인가? 나는 임신 기계가 아니다.

 

*독자들의 원활한 이해를 위해 임신중절을 낙태로, 포궁을 자궁으로 대체하여 표기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글 신은비 기자
god_is_rai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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