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특집
온몸으로 시작(詩作)하라시로 남은 사람 김수영
  • 김채린 기자, 이승정 기자
  • 승인 2018.09.30 23:35
  • 호수 1818
  • 댓글 0

지난 8월, 우리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재학했던 고(故) 김수영 시인의 작고 50주기를 맞아 부인 김현경 여사가 명예졸업장을 대리 수여받았다. 다음은 김 시인을 연구한 전문가들, 김 여사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한 가상인터뷰다.

 

Q. 연희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재학했다. 우리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A. 자라 온 환경 탓이 크다. 아버지의 강한 권고로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영어 교육에 힘쓰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자연스럽게 영어를 많이 공부하게 된데다 책을 많이 읽다보니 문학에도 관심이 생겼다. 사실 처음부터 연희전문학교에 가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 유학을 가서 도쿄 상과대에 2년 만에 붙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터져 학교가 폐쇄됐고, 만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 관립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에 비해 학풍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특별하거나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등록금이 비싸 혼자 공부하기 위해 한 학기 만에 자퇴했다.


Q. 나중에 우리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돼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A. 처음 강의 제안을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흥분된다. 연세대를 한 학기 만에 자퇴한 아쉬움을 만회했다. 포로수용소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변변한 직업을 구하기 어려웠던 데다가 불온시를 쓴다는 낙인까지 얻은 때였다. 그래서 번역이나 시평론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중 연세대에서 연락이 왔다. 좋은 대학에서 수준 높은 학생들을 가르칠 생각에 선뜻 수락했다. 연세대에서 수업을 할 당시 학생들로 중강당 하나가 가득 찼다. 강의가 끝나면 기립박수를 치는 학생들도 있었다.


Q. 「묘정의 노래」라는 시를 써서 등단하게 됐다. 여러 문학 갈래 중 시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A. 시는 함축적·은유적으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실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직후에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소설이나 산문은 위험했다. 산문을 쓰려는 아내를 내가 말렸을 정도였다. 산문은 장소와 시간이 구체화되는 만큼 더 조심스러웠다. 실제로 당시 남정현 소설가는 소설 「분지」를 집필한 뒤, 이북의 대미 비판에 동조한 것으로 몰려 구속되기도 했다.


Q.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A. 고를 수 없다. 내 작품에 큰 미련이나 애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전의 작품을 벗어나야 하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작품에 집착해서는 더 훌륭한 시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Q. 시를 쓸 때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
A. 시를 쓰는 것은 난산의 고통이다. 시작(詩作)은 머리나 심장으로 하는 게 아니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에 쓰일 단어 하나하나도 오래 고민하는 성격이라, 누군가 집중을 방해하면 언짢기도 하다. 시를 쓸 때만큼은 아내가 말을 붙이는 것도 싫어했다. 밖에 손님들이 와도 나가보지도 않았다. 나 대신 아내가 손님을 맞는 일이 잦았다.


Q. 시상을 떠오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인가.
A. 자유. 완전한 자유를 꿈꿨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에 발표하지는 못했지만 시 「김일성 만세」를 쓴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김일성 만세」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가 아니다. 당시 만연했던 표현의 억압에 반기를 든 시다. 정치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 어떻게 표현의 자유가 있겠는가. 인간애와 자연 역시 시상의 원천이었다.


Q. 시인으로서 살아가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았나.
A. 물론이다. 생활고가 심했다. 시 한 편에 30원을 받았는데 한 달 생활비가 2600원 정도였다. 하지만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시를 한 달에 한 편 실어줄까 말까 해, 시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웠다. 수입이 워낙 불규칙하고 적다 보니 아내가 양계를 시작했다. 아내는 돈이 없을 때도 내게 쌀이 떨어졌다거나 빚이 얼마 있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생활이 어려웠지만 아내와 함께 일하며 어떻게든 버텨냈다.


Q. 현실 참여적이고 저항적인 시인으로 많이 평가된다. 본인은 이런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나.
A.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고자 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평가가 일면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해 해석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내 모든 시가 ‘저항시인’이라는 방향성 하에 해석되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연에 대한 시도, 일상에 대한 시도 썼다. 내가 쓴 시어 하나하나에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작품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


Q.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어떤 사람인가.
A. 사실, 아내에게 심술도 많이 부렸다. 한 번은 아내가 내 약을 사러 간다고 나가서는 한참동안이나 들어오지 않았다. 화가 나서 대문 앞에 책들을 집어던졌다. 아내가 들어와서 아이와 함께 책을 옮길 동안 괜한 심술에 쳐다보지도 않고 마저 책을 읽었다. 많이 서운했을 걸 알면서도 좋은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하지만 가족을 많이 사랑했다. 아내가 한강까지 나가서 빨래를 하는 날이면, 해가 지고 어두워질 즈음 아내를 마중 나가 몇 분이고 기다렸다. 아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 좋은 고등학교에 보내려고 이리저리 노력했다.


Q.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청년들이 4·19혁명을 이끄는 것을 본 만큼, 그들의 의견과 힘을 매우 존중한다. 오늘날의 청년들도 그런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산문 「요즈음 느끼는 일」에서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로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격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젊은이들이 더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면 좋겠다. 사유하는 삶을 통해 미래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 돼야 한다.

 

글 김채린 기자
bodo_baragi@yonsei.ac.kr
이승정 기자
bodo_gongju@yonsei.ac.kr

김채린 기자, 이승정 기자  bodo_baragi@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오늘의 주요뉴스
“언더우드 선교사의 정신과 삶을 전세계로”
[신촌·국제보도]
“언더우드 선교사의 정신과 삶을 전세계로”
연세, 폭우마저 꺾었다
[신촌·국제보도]
연세, 폭우마저 꺾었다
글자 없는 세상, 당신은 살아갈 수 있나요?
[사회]
글자 없는 세상, 당신은 살아갈 수 있나요?
연고전 화보
[포토뉴스/영상기획]
연고전 화보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