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근 보도부장 (STP/철학·17)

스승. ‘스승’이라는 단어는 조금 묘하다. 일상대화에서 이 단어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스승의 날이라는 말 때문인지 낯설지만도 않다. 나는 이 단어를 좋아한다. ‘스승’에는 ‘선생’에게 없는 진심 어린 존경이 담겨있다. ‘교사’나 ‘교수’에는 없는 따뜻함이 있다. 스승은 그렇다.

고맙게도 내게는 스승이 참 많다. 중학교, 나를 사랑의 매로 가르친 스승이 있었다. 매섭게 혼내셨지만, 제자들을 혼낸 날에는 온종일 우울해하셨다.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마음에 묻고 계시더라. 대학교, 학생 하나하나를 모두 존중하는 스승이 있었다. 아들뻘 학생에게 아직 존댓말을 쓰신다. 나열하면 끝도 없다. 나는 스승들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 이 순간도 배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우리가 알던 ‘스승’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랑시에르는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어 강사 자코토의 예를 든다. 자코토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에게 네덜란드-프랑스어 대역본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반복해 읽게 했다. 통역의 힘을 빌린 매우 부족한 설명에도 학생들은 스스로 책을 읽어냈고 놀라운 학습 결과를 보였다. 랑시에르의 ‘보편적 가르침’ 개념이 여기서 나온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스승과 학생의 지능 차이는 없다. 스승을 스승답게 만드는 것은 지적 능력이 아니다.

그렇다면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가. 지능의 평등을 주장한 랑시에르의 글에서 스승의 참뜻을 찾았다. 랑시에르는 스승의 역할이 그저 모든 학생을 평등하게 대하고 믿는 것, 학생과 함께 하며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라 말한다. 조금 더 확장해보자. 결국 스승은 본보기이자 길잡이다. 지적 탐구를 하는 의지에서, 자성하는 태도에서, 소신 있는 행동에서.

문과대 A교수 일로 학교가 한창 시끄러웠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성희롱을 저질렀다. 이후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자백했으나 다시 말을 번복했다. 자신의 잘못을 교수들 간의 파벌싸움으로 몰아갔다. 징계를 받았음에도 아직까지 한마디의 사과도 없다. 그 긴 시간 동안 피해 학생들은 끝도 없이 아픔을 감내해야 했고, 조금씩 지쳐갔다.

A교수의 일이 불거진 뒤 나는 많은 교수가 학생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설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들의 반응은 소름 돋게 비슷했다. 쉬쉬했다. ‘개인정보 보호법 때문에…’, ‘교수 사회가 워낙 좁아서…’, ‘명예훼손의 위험이 있어서…’ 변명은 많았다. 그들에게 전한다. 진정한 스승이라면 같은 질문 앞에서 어떠한 대응을 했을지 생각해보시길. 피해 학생들을 외면한 순간, 스승이 아니길 택한 것이다.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못하고, 걱정 많은 한 인간만 남은 것이다.

최종 징계, 정직 1개월. 누군가는 충분하지 않으냐고 말한다. 중징계는 교수 생명의 끝이라고 말이다. 또 누군가는 묻는다. 1년이 넘도록 사과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냐고. 나는 집착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단지 강단에 섰던 그에게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길 바랐을 뿐이고 그에게서 아주 작은 스승의 파편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A교수에게. 당신은 자신을 스스로 우수한 교육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모든 학생에게 당신은 더 이상 스승이 아니다. 그저 동일한 강의를 반복하는 단순한 강의자다. 같은 내용을 반복 재생하는 기계다. 아니, 오류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고장 난 기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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